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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31일 목요일

한국의 국가 부채의 과거와 미래 (3)






 2. 미래 한국의 국가 부채 증가


 앞서 이야기 했듯이 현재까지 한국의 국가 부채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지만 미래에는 거의 필연적으로 높아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앞서 설명드린 대로 지출은 줄어들 수 없는데 미래에 조세 수입은 크게 감소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고령화 입니다. 


 이전 한국의 잠재 성장율 추락 가능성에 대한 포스팅에서   (  http://blog.naver.com/jjy0501/100158978765 참조)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은 현재 OECD 국가 가운데 3번째로 젊은 나라이지만 2050 년 즈음에는 일본에 이어 두번째로 늙은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 시기가 오면 65 세 이상 인구가 지금의 11.3 % (2011 년) 에서 2050 년에는 38.2% 까지 증가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구 10 명 중 거의 네명 꼴로 65 세 이상 인구인 셈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경제 활동을 활발히 하는 20  - 64 세 인구의 비중이 크게 감소함을 뜻하며 결과적으로 한국의 잠재 성장율과 실제 성장율이 낮아지는 것은 물론 전체 인구에서 실질적인 납세자의 수가 줄어들게 됨을 의미합니다. 



 (한국의 장기적 인구 구조 변화 예상.    출처 : OECD) 


 (한국의 잠재 성장율 예상. 출처   OECD ) 


 납세자는 줄게되도 세금으로 부양해야 하는 노인인구는 급격하게 증가하게 됩니다. 아무리 한국이 노인 복지에 예산을 투입하는 정도가 크지 않다고 해도 노인 인구를 완전히 방치할 수도 없는 일이기에 실제로는 이런 저런 노인 복지 관련 예산이 투입됩니다. 예를 들어 최악의 노인 빈곤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의 기초 노령 연금이 있습니다. (참고로 기초 노령 연금과 장애인 연금은 2012 년 기준으로 기본 수령액이 독신인 경우 월 9만 4600 원이고 부부인 경우 15만 4100 원입니다. ) 기초 노령 연금의 경우 2011 년 현재 GDP 대비 0.4% 지출을 하고 있으나 2030 년에는 1.7% 수준으로 확대될 것으로 보입니다. 


 미래에는 빈곤 노인층의 수가 많아져 현재의 의료 보호 1/2 종에 해당하는 환자가 크게 증가할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의 경우에 의료비 부분을 국가에서 지원합니다. 이런 공공 의료 보조 및 의료보험의 당해연도 적자를 정부 지출로 보전한다면 GDP 대비 정부 부담은 2011 년의 0.27% 에서 2030 년 2.16% 정도로 크게 높아질 것입니다.  


 즉 현재와 같은 수준으로 지출을 유지한다고 가정할 경우 - 사실 현재의 지출 수준 자체가 그다지 높다곤 말할 수 없어서 한국의 사회 안전망이나 복지 수준은 낮은 편이긴 합니다. - 미래에는 조세로 재원을 충당해야 하는 지출이 크게 증가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생각할 점은 지금 당장에는 국가 채무로 계산하지 않지만 미래에 국가 채무라고 할 수 있는 연금입니다. 군인 연금은 2011 년 수준의 적자가 (GDP 의 0.1%) 2030 년 까지 유지되고 공무원연금은 적자 규모가 크게 확대 (2011 년에 GDP 대비 0.1% 에서 2030 년에는 0.7% 로 증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사학 연금의 경우는 2021 년부터 적자로 반전되어 2030 년에는 GDP 대비 0.1% 규모 적자가 생길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공적 연금의 적자를 정부 지출로 보전할 경우 정부 부담은 2011 년의 GDP 대비 0.62% 에서 2030 년 2.61% 로 크게 증가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미래에는 앞서 지적했듯이 납세자 자체가 줄어들게 됩니다. 따라서 세금 낼 사람은 적어지는데 세금으로 메꿔야할 부분은 증가하게 되어 필연적으로 일반 회계에서 재정 적자가 급증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은 예측은 현재와 같은 출산율이 유지되면서 현재 수준에서 복지가 더 강화되지 않고 2008 년 글로벌 경제 위기와 같은 대규모 경제 위기가 없다는 전제하에 추정한 것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정부 부담을 대폭 줄이는 법안을 통과시키지 않는안 이보다 대개는 더 나빠지리라는 점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사회 안전망을 줄이게 되면 현재도 꽤 문제가 되는 노인 빈곤층 문제는  매우 심각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편 앞에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미래 한국의 국가 부채를 위협할 한가지 더 추가적인 요소가 국민 연금입니다. 국민 연금은 현재 상태를 추정하면 약 2044 년 이후는 적자로 전환됩니다. 결론적으로 노인은 많고 이를 부양할 젊은 층은 적어질 것이기 때문에 국민연금의 미래는 별로 밝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민 연금은 규모가 너무 크기 때문에 아마도 조세로 이를 충당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가능하지 않아 보입니다. 이전 일본의 국가 채무 문제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노인 인구 증가는 사회 보장의 비용 증가란 면에서 거의 재앙에 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http://blog.naver.com/jjy0501/100146181466 참조 )  



 한국 은행에서 나온 '부채경제학과 한국의 가계 및 정부 부채' 라는 보고서에서는 2030 년 정부 부채 비중이 이와 같은 인구 고령화에 따른 사회 보장성 지출 증가로 GDP 대비 70% 수준까지 상승하게 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이에 의하면 국가 부채 수준은 2015 - 2017 년 사이 까지는 줄어들 수 있으나 이후로는 증가하게 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물론 사회 복지 부분에 현 수준 이상으로 더 지출을 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서 추정입니다. 


 하지만 이는 일반 회계 예산에서 나오는 부채 규모를 예상한 것으로 앞서 이야기했듯이 일반회계 부채는 국가 채무의 일부일 뿐입니다. 현재도 계속해서 저축 은행과 같은 부실 금융 기관 정리를 위한 공적 자금 투입은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불경기 상황이 되면 2008 - 2010 년 사이 그랬듯이 다시 공격적 적자 재정 편성이 불가피 한 만큼 2030 년에는 국가 부채가 GDP 대비 100% 수준에 이를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서는 보고 있습니다. 


 최근에 정부가 처음으로 발생주의와 복식 부기 원칙을 적용한 국가 재무 제표를 작성 2012 년 5월 31일 국회에 제출했는데 여기에서는 국가부채가 402 조원 대신 774 조원으로 불어나있습니다. 이는 앞서 말한 공무원, 군인연금 지급액 같은 향후 정부 재정 부담이 될 수 있는 부분을 미리 부채로 계산해서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면 확실히 국가 부채가 GDP 대비 70% 수준인 것 같지만 실제적으로 미래에 부담할 부채를 지금시점에서 합산해서 표기하지 않는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미래의 정책에 의해 바뀔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시점을 2030 년 정도로 본다면 아무튼 그 시점에서는 앞서 이야기한 잠재적 부채가 실제 부채로 전환되어 이것 만으로도 GDP 대비 부채가 70% 는 확실히 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실제로는 그보다 더 높을 가능성이 높겠죠. 


 또 한가지 생각할 변수는 바로 공기업 부채입니다. 특히 LH 공사의 부채가 문제가 되는데 부채 규모 자체가 이미 2010 년에 이미 100 조원을 돌파한 이후 2012 년에는 이미 130 조원도 돌파한 상태입니다. 사실 금융 부채 비율도 400% 를 훌쩍 넘기는 수준에서 겨우 자산을 더 확보해서 비율을 500% 대에서 400% 대 로 간신히 맞추는 수준이고 LH 공사 자체 능력으로 이를 상환할 상황은 이미 물건너갔다는 의견이 대두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LH 공사가 하는 사업 자체가 주택 공급등 국가 경제에 중요한 부분이 있는 것 역시 사실이라 그냥 긴축만 하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기도 합니다. 더 아이러니 한 부분은 LH 공사가 이렇게 많은 빚을 지게 된 것이 주택 마련 이나 각종 국책 사업을 진행하면서 그렇게 된 것인데 본래 의도한 데로 부동산 가격이 안정되면 LH 공사는 적자가 더 커져 빚을 상환할 가능성이 더 줄어든다는 점입니다. 


 아무튼 LH 공사 부채가 그냥 전 정권의 잘못 - 사실 참여 정부 때 부채가 급증했기에 잘못이 없다고 할 순 없지만 - 이기만 하다면 왜 정권이 바뀌는데도 부채가 이자 비용 이상으로 급증하는지 설명하기 힘들 것입니다. 한마디로 LH 공사 사업이 지역 개발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정치적, 경제적 이권이 걸리다 보니 현 정권에서도 (그리고 아마도 다음 정권에서도) 그 사업을 대거 축소 하긴 힘들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도저히 감당 가능하지 않은 부채 때문에 일부 사업은 중단) 


 한국 은행 보고서에서는 LH 공사의 재무 건전성을 확보하면서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 2030 년까지 정부가 추가로 54 - 61 조원 정도를 부담해야 할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부동산 경기가 심각하게 둔화되는 경우 분양률 및 수익률 하락으로 LH 공사는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봉착할 것이며 예정에 없던 대규모 공적 자금 투여가 불가피해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공기업 부채가 상당 부분 국채로 전환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지난 10 여년간 역대 정권들이 국회의 동의없이도 쉽게 예산을 빚으로 확보해서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공기업 주도 국책 사업을 추진했는데 대표적으로 노무현 정권 당시 국민 임대 주책 100 만호 건설, 세종시 건설, 혁신도시 건설 등으로 LH 공사가 막대한 부채를 얻게 된 점이나 이명박 정부에서 핵심 사업으로 추진한 4대강 사업으로 수자원 공사 부채가 경이적으로 늘어난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이외에도 이런 저런 국책 사업을 한다고 부채가 급격히 늘어난 공기업과 더불어 물가 안정을 위해 공공 요금이 동결되면서 부채가 급증한 공기업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들 공기업이 상환 능력이 없는 경우엔 나중에 공적 자금 투입이 불가피해지며 (왜냐하면 LH 나 수자원 공사, 혹은 한국 전력 공사를 파산하게 둘 순 없기 때문) 그 경우 이전에 외환 위기 직후보다 더 천문학적인 공적 자금이 들어갈 가능성도 있습니다. 따라서 공기업 부채는 미래에 중요한 위험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래를 무조건 비관적으로만 볼 수는 없는 일이지만 아무리 낙관론을 동원하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다고 해도 미래 한국의 국가 부채가 지금보다 증가될 것은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다만 향후 수년 정도는 글로벌 경제 위기가 다시 재발 하지 않는 이상 국가 부채가 급증하진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다시 글로벌 경제가 불안불안하다는 것인데 그러면 한국의 국가 채무는 예상했던 것 보다 더 빨리 증가될 불길한 가능성도 있습니다. 


 한가지 희망을 가진다면 미래는 예측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미래 한국 경제에 뭔가 획기적인 돌파구가 열리기를 희망해 봅니다. 아무튼 국가 채무가 장기적으로 컨트롤 가능한 수준에서 유지되지 못하면 결국 그리스 처럼 국민 모두가 힘들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참고 


 부채 경제학과 한국의 가계 및 정부 부채.   한국 은행 

디아블로 III 또 접속 대란






 (위 스샷은 3일전 마지막으로 접속된 필자의 바바리안) 


 블리자드가 1.02 패치를 진행되면서 일단 국내 북미섭 유저부터 안되기 시작하더니 패치가 끝난 후 전체적으로 접속 대란이 시작되어 대다수 유저가 게임을 전혀 진행 못하거나 하다가 튕기거나 아무튼 게임을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시아 서버 (일설에 의하면 이름만 아시아 서버고 그냥 미국에 있는 서버란 설도 있음) 에 들어가지 못해서 북미 섭에 캐릭터를 만드신 분들은 어제부터 접속이 불가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을 것입니다. 





(이번 디아블로 3 의 진짜 끝판왕이라고 불리는 Error 37  어떤 유저도 이건 잡을 수 없음 )


 아무튼 이로인해 패키지 게임을 사고도 접속이 안되서 플레이를 못하는 웃기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데 유저들의 원성이 자자한 상태입니다. 최소한 클라우드 저장 방식 정도만 선택할 수 있게 하고 싱글은 오프라인으로 돌려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블리자드의 막장 운영으로 인해 요즘은 NC 나 넥슨이 다시 재평가 받는 상황입니다. 국내 개발사도 이정도로 막장 운영은 한적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블리자드에 운영에 실망한 유저들이 하나 둘이 아니라 회사 차원에서 뭔가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에러나 실수는 인간인 이상 없을 수 없지만.... 그래도 세계에서 가장 큰 MMORPG 인 WOW 를 다년간 운영한 블리자드에서 이런식으로 오랜 시간 준비한 게임을 막장 운영하다니 실망이 크네요. 


HDD 공급은 정상화 - 하지만 태국 홍수 후 달라진 점



 작년 말 (즉 2011 년 4/4 분기) HDD 가격 폭등을 불러온 태국 홍수에서 HDD 제조사들은 어느 정도 생산량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이미 2012 년 1분기 말 출하량 감소는 16.6% 수준으로 이전의 30% 수준에 비해 많이 회복된 상태이고 2012 년  2분기에는 이보다 더 회복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HDD 가격은 작년 중반기에 비해 높은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2012 년 1분기 말 HDD 1 대당 가격은 이전보다 28% 정도 증가된 상태입니다. 


 한편 HDD AS 기간이 대폭 감소하고 한대당 가격이 증대되면서 오히려 HDD 제조사들은 수익이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홍수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웨스턴 디지탈의 경우 2012 년 분기에 4420 만대의 HDD 를 출하하면서 매출 30억 400만 달러에 순수익 4억 8300 만 달러로 16% 의 수익 마진을 달성했으며 큰 피해를 입지 않은 씨게이트의 경우 수익 마진이 11억 4600 만 달럴로 25% 라는 기록적인 수익 마진을 올리는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국내에서 HDD 가격이 1년 전보다 높게 유지되는 건 한국만의 상황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년에 HDD 제조사가 결국 2 개로 정리되는 과정에서 HDD 제조사들은 이전처럼 경쟁의 필요성이 크게 감소했고 AS 기간 단축이나 개당 단가를 높이는 방식으로 수익 마진을 높이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제조사 입장에서 태국 홍수는 오히려 전화 위복의 기회가 된 셈인데 특히 공장에 별 피해를 입지 않은 씨게이트가 더 큰 수혜자가 된 셈입니다. 


 다만 2012 년에도 SSD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어 결국 연말에는 1GB 당 1 달러 수준까지 가격이 하락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4-5 년 후 만약 1 TB SSD 가 100 달러 선까지 떨어지면 이후로는 HDD 제조사들도 지금보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HDD 가 한동안 사라지기는 힘들다고 봅니다. 대용량 데이터 저장이나 서버시장에서 HDD 의 역활은 아직 중요하기 때문이죠.


스펙시트 ? 스페인 위기 확산




 2012 년 5월 부터 유럽 재정위기가 다시 부각되면서 서서히 진원지로 평가받는 그리스 외에 스페인이 새로운 이슈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미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상황을 그렉시트 (Grexit : Greece + exit) 라는 신조어가 탄생한 상황에서 최근에는 스페인의 유로존 탈퇴를 의미하는 스펙시트 (Spexit : Spain  + exit) 라는 신조어가 탄생했습니다 스페인의 유로존 탈퇴는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를 넘어서는 경제 이슈로 최근 이전보다 더 심각하게 거론되고 있습니다. 


 현재 스페인이 처한 상황은 사실 그리스와는 많이 다릅니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은 그리스는 비대한 공공 부분 부실과 재정 적자가 위기의 근원이 된 반면 스페인은 민간 부분 부실이 정부 쪽으로 옮겨간 경우라는 점입니다. 


 앞서 그리스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했듯이 그리스는 아주 왜소한 민간 경제가 거대한 공공 부분을 떠받치는 기형적인 구조였고 매년 막대한 재정 적자가 심각한 원인으로 본래 유로존 기준인 GDP 대비 -3 % 를 달성한 건 유로존에 가입했을 때 한번 뿐이고 지난 수십년간 계속 큰 빚을 져가면서 국가를 운영해 왔습니다. 여기엔 물론 그리스 정부의 지출이 많아서뿐만 아니라 그리스 국민들이 세금을 안내기 위해 노력 (즉 탈세) 했던 것도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은 유로존 국가 가운데서 상당히 건전한 재정을 유지한 국가 였습니다. 국내에서는 아마 일부 언론들의 잘못된 보도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겠지만 최소한 스페인은 복지 포퓰리즘 때문에 재정 위기가 왔다고 말하긴 매우 어려운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2008 년 이전까지 스페인은 유로존은 물론 OECD 국가 가운데서도 꽤 건전 재정을 유지하던 국가였기 때문입니다. 즉 적자가 나는데도 선심성 예산을 대폭 편성해가면서 유지한 적은 없다는 것이죠. 심지어 지금까지도 스페인은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보다 GDP 대 정부 부채 비율이 낮습니다. 



 (2009 년, 주요 선진국의 부채 비율. 스페인의 정부 부채 비율은 다른 선진국 대비 낮은 편으로 사실 2008 년 전에는 IMF 및 EU 의 권고치인 GDP 대비 60% 보다 훨신 낮은 수준으로 유지한 국가였음. 대신 민간 부분 부채가 크다는 점에 주목.  Source: Boston Consulting Group: http://www.bcg.at/documents/file87307.pdf (23 September 2011)  저자  Spitzl  )  


 스페인이 2008 년 이후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은 것은 주로는 자산 거품, 특히 부동산 거품과 관련이 깊습니다. 1997 년에서 2007 년 사이 스페인의 부동산 자산 가치는 몇배로 상승했고 유로존 가입이후 금리가 대폭 낮아지면서 최대한 빚을 끌어다 상승하는 부동산 - 주택이든 건물이든 - 을 구매하려던 열기가 온 나라를 휩쓸었습니다. 


 사실 이런 부동산 광풍은 우리에게도 그다지 낯설지는 않은데 우리 역시 2007 년 이전까지 인간의 광기까지 엿보이게 만드는 부동산 신화가 존재했기 때문이죠. 다만 한국만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2000년에서 2007 년 사이 세계적으로 풍부하게 공급된 유동성으로 인해 부동산 가격은 일본을 제외한 주요 선진국에서 강한 상승세를 보이며 인간의 탐욕을 자극했습니다. 


 하지만 미친 아파트 가격이란 소리가 나왔던 한국마저도 제대로 미친게 분명해 보이는 스페인 부동산 광풍에 비해서는 양반이었습니다. 일단 스페인의 부동산 열기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스페인은 본래 주택 보급율이나 자가 주택 소유 가구가 매우 높아 전체 가구의 80% 가 자기 집이 있었던 국가였습니다. 따라서 신규 주택에 대한 수요가 자기 집이 없는 사람이 많은 한국보다 더 낮아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그냥 사두기만 하면 은행 이자보다 몇배는 빨리 집값이 상승하다 보니 모두가 너도 나도 빚을 빌려 부동산을 사려했고 안사면 나만 손해라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었습니다. 특히 스페인이 유로존에 가입한 이후 낮아진 금리 덕분에 부동산 가격 상승율과 금리의 차이는 더욱 커졌고 그럴 수록 더 많은 빚을 빌려 부동산을 구입하는게 이익이었습니다. 여기에 유로존 가입 후 독일 등 해외에서까지 가치가 오르는 스페인 부동산을 구입하려 하다보니 같은 시기의 한국보다 더한 부동산 광풍이 스페인을 강타했었습니다. 이와 같은 자산 가치 거품을 유로 버블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유로화 가입이 이를 심화시킨 중요한 원인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유로화 가입 후 스페인의 수출 경쟁력은 급격히 하락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은 2차 산업 비중이 그리스보다 훨씬 높고 수출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6% 정도로 그다지 작지 않은 국가입니다. 


 스페인이 과거 자국 화폐 (페세타 화) 를 지녔을 때는 유로화 보다 가치가 낮아 수출에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수출 규모를 감안하면 독일 마르크화의 가치가 페세타 화 보다 높을 것이고 이 상황에서는 스페인이 환율 덕에 독일 제품에 대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로화 가입 (2002 년)  후 이와 같은 이점은 사라졌고 유로화 자체의 가치가 올라감에 따라 스페인 국민의 구매력은 높아졌지만 기업들은 적지 않은 부담을 지게 되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유로화 가입 후 스페인의 자산 가치 거품이 심각하게 진행되면서 본래도 높았던 건설 부분이 새로운 건축 수요 덕에 엄청나게 비대해졌습니다. 2009 년 추산으로 건설 부분이 GDP 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10% 이며 이는 나머지 2차 산업 부분의 11.7% 와 거의 맞먹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건축 붐이 중단되었을 때 스페인 경제에 미친 충격파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스페인은 우리나라의 저축은행과 비슷한 개념이지만 훨씬 오래되고 견고한 지방 금융 기관인 카하스 (Cajas) 가 잘 발달되어 있습니다. 많은 스페인 국민들이 여기서 돈을 빌려 부동산을 구입했는데 유로화 가입후 금리가 매우 싸진데다 당시 유동성이 넘처 흘렀기 때문에 쉽게 돈을 빌릴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카하스들도 자금을 쉽게 조달에 대출을 해줬습니다. 


 그러다 2008 년 금융 위기로 급격한 신용 경색이 오고 돈을 빌리기 힘들어지자 스페인 경제는 급속도로 마비되기 시작합니다. 이는 한국과는 차이가 있었는데 일단 한국은 부동산 광풍이라고 표현된 상황에서도 DTI 규제등 이런 저런 규제가 엄격했고 무엇보다 금리가 그렇게 저렴하지 않았는데다 해외에서까지 한국 부동산을 구매하려 자금이 몰리진 않았기에 사실 스페인 처럼 심각한 부동산 거품이 생긴 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다 2008 년 위기 이후 다시 한국의 경우 환율이 조정되면서 기업들이 다시 가격 경쟁력을 찾을 수 있었지만 스페인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2009 년 이후 스페인 경제는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카하스들은 심각한 부실 자산을 떠안게 되면서 생존 여부가 불투명해졌습니다. 특히 독일이나 프랑스 등 다른 유로존 국가에서 자금을 많이 조달했기에 이 문제는 곧 유로존 전체의 문제로 비화됩니다. 이 시기 이후로 스페인 정부는 세수가 급격히 줄고 지출은 갑자기 줄일 수 없었기에 이전에는 없던 막대한 재정 적자를 내면서 국가 부채는 빠른 증가 속도를 보입니다. 다만 아직도 미국이나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보단 낮은 수준입니다.


 스페인 당국은 금융위기 후 급속히 부실회된 카하스들을 구조조정하고 통폐합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담보로 잡은 부동산 가치가 폭락하고 대출을 해준 개인이나 기업들이 돈을 갚기 힘들어지자 이들 은행들은 집단으로 부실해졌습니다. 지금 문제가 되는 스페인 4위 은행 방키아 (Bankia) 역시 이런 카하스들을 통폐합해서 만들어진 은행입니다. 


 거품이 클 수록 꺼질때의 충격 역시 큰법인데 거대한 버블을 만들었던 스페인 경제는 그 충격으로 인해 점차 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스페인의 내수 경제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된 상태에서 수출로 이 위기를 극복하는 한국 같은 선택이 불가능한 이유가 환율이 전혀 도와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페인의 주요 수출국은 같은 EU 국가인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포르투갈, 영국 등인데 영국만 빼고 다 같은 유로화를 사용하니 스페인 경제가 타격을 입어도 환율로 인한 수출 경쟁력을 확보할 방안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인 경우가 한국인데 조금만 경제 사정이 나빠지면 바로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가면서 원화 가치가 떨어지고 자연스럽게 환율이 조정되어 수출 경쟁력 확보 -> 제조업 중심 경기 회복의 코스를 그리는 경험이 1997 년 외환 위기와 2008 년 금융위기 때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이나 그리스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 입니다. 


 아무튼 스페인 경제가 계속 나락으로 떨어지고 회복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서 스페인 은행들의 사정도 계속 악화되는 상황이 지속됩니다. 특히 아직도 부실 자산을 해결 못한 방키아는 최근 위기설이 나돌면서 190 억 유로의 추가 구제 금융이 집행될 예정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사실 방키아만이 문제가 아니기에 스페인이 과연 자국의 주요 은행들을 살려낼 수 있을지 의구심이 증폭되는 것이며, 시중에서는 스페인 국채 금리가 급격히 상승 7% 대에 근접하는 상황입니다. 


 문제는 스페인의 경제규모가 커서 (1조 유로 수준) 스페인이 구제 금융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미 그리스등의 구제 금융으로 인해서 막대한 돈이 들어간 다음이라 스페인의 구제 금융이 진짜 필요해진다면 다시 한번 막대한 자금을 어디서인가 조달해야 하고 이는 다른 유로존 국가들에 큰 부담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이 문제가 이탈리아까지 확산되면 문제가 더 심각해 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출처 






2012년 5월 30일 수요일

선사시대 부터 존재한 빈부 격차





 아마도 빈부 격차라는 것은 인류 역사의 초창기 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오늘날 수렵 채집 생활을 하는 원주민들도 자신의 소유, 즉 사유 재산의 개념을 희박하게나마 가지고 있고 아마 오래전 인류도 그랬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아마도 이와 같은 소유의 격차가 커진 것은 농업이 도입되고 토지 소유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였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최근 브리스톨, 카디프, 옥스포드 대학의 고고학자들은 7000 년전 중부 유럽에서 발굴된 300 구 정도의 유해와 부장품을 분석해서 신석기 시대 농부들도 경제적인 불평등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점을 추정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7000 년전 유럽에서는 원시적인 농업이 자리잡기 시작했는데 석기 낫을 비롯한 여러 농업에 필요한 부장품의 숫자와 매장 상태를 분석한 고고학자들은 모든 초기 유럽 농부들이 같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 이들의 유골의 연대를 측정하는데 사용된 스트론튬 동위원소 연대 측정을 통해 여성들은 주로 외부에서 결혼해서 해당 지역으로 온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그렇다면 토지 소유자들은 남성들이었다는 결론이 가능합니다. 


 아마도 이 시기 부터 토지와 가축의 소유라는 개념이 발달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이미 남성이 소유의 중심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연구진들은 결론내렸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유재산의 세습이라는 전통이 이미 초기 농업 시대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인간의 본성을 생각하면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되긴 합니다. 이 연구 결과가 의미하는 것 - 인간이 초기 문명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빈부 격차와 불평등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복잡한 사회가 세워지면서 이는 더 심화되었다는 추론 - 자체는 그다지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지만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그 증거가 발견되었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이 연구는 PNAS 에 기재되었습니다. 


Journal Reference:
  1. R. Alexander Bentley, Penny Bickle, Linda Fibiger, Geoff M. Nowell, Christopher W. Dale, Robert E. M. Hedges, Julie Hamilton, Joachim Wahl, Michael Francken, Gisela Grupe, Eva Lenneis, Maria Teschler-Nicola, Rose-Marie Arbogast, Daniela Hofmann, and Alasdair Whittle. Community differentiation and kinship among Europe’s first farmers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May 29, 2012 DOI: 10.1073/pnas.1113710109



팀쿡의 신제품 발언 - 과연 진실은 ?



 현지 시각으로 5월 29 일, 애플의 팀 쿸 CEO 가 믿기 어려운 (Incredible) 신제품을 자신들이 준비중이라고 언급했다고 합니다. 이는 6월로 알려진 WWDC 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여러가지 추측을 낳고 있습니다.  물론 첫번째 추정은 차세대 아이폰 - 그것이 아이폰 5 가 되든 아니든 간에 - 일 것이라는 추정이겠죠. 최근에 엔가젯등 매체에는 차기 아이폰이라고 주장되는 제품 사진들이 올라와서 이제 슬슬 차기 아이폰이 등장할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아이폰 관련 루머는 실제 애플이 발표하기 전까진 그 무엇도 100% 믿을 순 없지만 시기상 차기 아이폰이 등장할 때가 된 것 만은 사실입니다. (유출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미지에는 약간 커진 액정과 더불어 새로운 커넥터가 등장) 


 일각에서는 이전부터 언급되어 왔던 iTV 가능성이나 혹은 아이패드가 나왔던 2 년전부터 곧 (?) 출시된다고 했던 7 인치 아이패드라는 설도 제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언론 기사대로면 아이폰 5, iTV, 7 인치 아이패드는 작년까지는 다 출시되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출시되지 않았죠. 





 물론 정말 기대했던 것은 쏙 빼놓고 WWDC 를 준비해서 모두를 실망시킬 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차기 신제품 소식이 궁금해 지는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왠지 저는 믿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신제품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은 느낌이 드네요. 솔직이 이는 고 스티브 잡스 전 CEO 가 살아있을 때 진작에 나왔어야 하는 제품입니다. 사실 이 제품이 없이는 애플은 진정한 애플이 될 수 없죠.  (다만 대박 스포일러를 담고 있어서 준비 되신 분들만 스크롤을 아래로 내리시기 바랍니다. 이걸 미리 보시는 분들은 나중에 저에게 화내시면 곤란합니다. 그런 분들은 정중히 뒤로 가기를 누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애플 로고가 새겨진 사과입니다. 검은색과 하얀색 로고 두가지가 새겨진 감성적 사과는 제 생각에 블랙과 화이트 단품이 $ 9.99 에 12 개 들이 박스에 $ 99.99 정도 할 듯 한데 아마 한국은 1 차 정발 국가에 빠질 듯 합니다. 생산은 중국에서 할 듯 싶지만 최근에 팀 쿸 CEO 가 미국에서 생산을 늘리겠다고 한 점을 볼 때 미국산 사과가 들어간 애플 제품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재미없으셨으면 죄송하지만 언젠가 나올 것 같지 않나요 ㅎㅎ )

Geforce GTX 660 관련 루머





 역 시 아직까지는 루머이고 정식으로 공개된 내용이 아니지만 엔비디아가 6 - 7 월 중에 메인스트림 제품의 세대 교체를 위해 28 nm 공정 케플러 아키텍처 기반의 GTX 660 을 선보일 것이라고 다수의 매체들이 전했습니다. 이에 의하면 이번 660 제품 라인업은 이전 같으면 450 정도 라인업이었던 GK 106 이 담당하게 된다고 합니다. 




 GK 106 은 4개의 SMX 를 지녀 정확히 GK 107 의 절반 수준이며 이 경우 768 개의 쿠다 코어를 지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메모리 버스는 소스에 따라 192 bit 와 256 bit 등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메모리는 2 GB 설이 유력한데 아마 가격을 줄이기 위한 1 GB 모델도 등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세한 클럭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TDP 는 130 W 란 루머가 있습니다. 






 (이전에 웹에 떠돌아 다니던 GK 106 의 기반이라고 주장하는 기판 설계. 현재의 450/550 보다 오히려 간단해 보이는 설계지만 GTX 670 을 감안하면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됨. ) 




 일 단 쿠다 코어 768 이면 대략 기존의 384 개의 쿠다 코어를 지닌 560 Ti 에 비해 동클럭에서 성능이 약간 우세한 정도로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하지만 28 nm 공정의 힘으로 더 높은 클럭으로 작동이 가능할 테고 특히 작은 칩인 만큼 1 GHz 는 충분히 뛰어넘는 클럭을 보일 것으로 보여 현재의 560 Ti 나 570 도 뛰어넘지 않을까 하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네요. 


 관 건은 가격인데 딱히 경쟁자도 지지부진한 상태인데다 28 nm 웨이퍼 가격이 비싼 관계로 가격은 꽤 높을 것으로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현재 루머로는 299 에서 350 달러라는 설이 나오고 있으며 아마 옵션에 따라 약간씩 가격 차이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뭐 아직은 루머 단계지만 680/670 가격을 생각하면 660 가격이 그렇게 저렴하진 않을 것으로 예상해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다만 워낙 물량이 부족한게 사실이라 사실 빨리 나오기나 했으면 하는 분들이 많으실 것으로 보이네요. 가격만 저렴하면 이전 세대를 올킬할 제품 같지만 불행히 가격이 그렇게 저렴할 것 같지는 않아보인다는 게 개인적 추측입니다. 




 지금까지는 루머지만 아무튼 곧 출시될테니 그 때가 되면 명확히 알게 되겠죠 ㅎㅎ 




계속 진행되는 그린란드 빙하의 소실




 최 근의 연구들은 그린란드의 빙하가 녹는 속도가 분명히 이전보다 더 빨라졌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대략 285 만 입방 킬로미터 방대한 얼음이 빙하의 형태로 그린란드에 존재하는데 이들이 모두 녹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만약 다 녹는다면 전세계 해수면은 7 미터 가량 상승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사 실 지구 온난화 모델에서 극지방의 온도상승이 지구의 다른 지역의 온도 상승보다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예측은 실제 관측으로도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북극권의 온도 상승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해서 지구의 기온이 상승하고 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GISS 의 2000 - 2009 년 온도 변화. 1951 년에서 1980 년 사이 평균 기온에 비해 얼마 정도 온도가 상승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임. 출처 NASA Earth Observatory Image of the Day: 2009 Ends Warmest Decade on Record http://earthobservatory.nasa.gov/IOTD/view.php?id=42392  )




 최 근 독일의 지질학 연구 센터 (GFZ) 의 연구자들은 세개의 독립적인 위성 데이터를 활용한 연구에서 다른 연구 비슷한 연구 결과와 유사한 결론을 내렸는데 그것은 지난 50 년간과 비교해 지난 10 년간 그린란드의 빙하량 소실이 매우 두드러지게 높다는 것입니다.




 그 린란드 뿐 아니라 빙하는 끊임없이 일부가 녹고 일부는 새로 생성되면서 그 질량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최근에는 전세계의 빙하들이 그 질량을 잃고 있으며 이는 몇몇 고산 지대 빙하 및 그린란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이 연구에서는 그린란드의 빙하 소실로 인한 해수면 상승이 최근에 더 빨라져 매년 0.7 mm 에 이르고 있으며 이는 현재의 3 mm/year 중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특히 녹는 속도는 점점 더 가속되고 있어 우려를 더하고 있습니다. 그린란드의 빙하 소실은 해수면 상승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 현재 중요한 관측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린란드를 덮고 있는 빙하의 두께 
  Sources used:

  • NGDC ETOPO1 (public domain)
  • Location of GISP2 drill: NCDC/NOAA
  저자  Eric Gaba )




 미래에 과연 예측치를 수정할 정도의 해수면 상승이 일어나게 될지 주목되는 연구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이 내용은  Earth and Planetary Science Letters 에 기재되었습니다.




 출처




Journal Reference:
  1. Ingo Sasgen, Michiel van den Broeke, Jonathan L. Bamber, Eric Rignot, Louise Sandberg Sørensen, Bert Wouters, Zdeněk Martinec, Isabella Velicogna, Sebastian B. Simonsen. Timing and origin of recent regional ice-mass loss in Greenland. Earth and Planetary Science Letters, 2012; 333-334: 293 DOI: 10.1016/j.epsl.2012.03.033




http://en.wikipedia.org/wiki/Climate_of_the_Arctic#Greenland


http://www.sciencedaily.com/releases/2012/05/120529133644.htm

2012년 5월 29일 화요일

십자군 전쟁사 - 살라딘 15


 36. 예루살렘으로 


 1187년 7월 4일의 하틴의 결정적인 승리는 살라딘과 그의 무슬림 군대에는 알라의 은총이 같이 하는 것으로 생각될만큼 절대적인 승리였다. 적의 주력은 분쇄되었고 국왕을 비롯한 주요 귀족들을 붙잡혔으며 여기에 겨우 살아서 탈출한 레몽3 세 역시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이제 살라딘의 군대가 성도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을 정복하는데 방해되는 것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살라딘의 막사에서는 그날 밤 '알라는 위대하다' '알라 이외의 신은 없다' 라는 기도 소리가 높게 울려퍼졌다고 한다.


 살라딘은 적에게 회복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발빠르게 적의 주요 도시들을 접수했다. 1차 십자군 이래 팔레스타인의 주요 십자군 도시들이 하나하나 살라딘의 깃발아래 정복되었다. 레몽의 아내인 에쉬바가 지키던 티베리아스 성채는 더 이상 구원의 희망이 없음을 깨달은 그녀에 의해서 살라딘에게 양도되었다.


 7월 5일 살라딘은 그녀와 그녀의 시종 및 자녀들이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대신 성채를 접수했다. 이제 티베리아스는 살라딘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제 살라딘의 승리를 알게된 팔레스타인의 무슬림 농민들과 노예들, 그리고 포로들, 그리고 심지어 평소 이단으로 몰리던 토착 동방 기독교도들은 살라딘과 그의 군대의 진군을 크게 환영했다. 그들은 해방자였다.


 반면 기독교군의 저항은 미미했다. 살라딘은 부분적으로는 그들의 저항을 더 미미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너무나 관대한 항복 조건들을 내걸었다. 대개 포위된 십자군들은 원하는 조건으로 항복하거나 성을 포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결과 십자군은 포위된 잔존 병력들이 대부분 피해를 입지 않고 퇴각할 수 있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십자군에게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준 셈이었다.


 아무튼 살라딘은 신속하게 이동하여 7월 중에 아크레, 자파, 베이루트, 시돈 등 주요 도시들을 하나씩 점령했다. 점령하는 곳마다 무슬림 포로와 노예들을 모두 풀어주고 전리품들은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니 살라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고 한다.


 여러 도시들 가운데 점령을 모면한 것은 티레와 아스칼론 항 및 예루살렘 정도였다. 티레 항의 경우 유럽에서 나타난 몽페랏의 콘라드 (
Conrad of Montferrat) 덕분에 도시가 넘어가기 직전에 사수할 수 있었고 나머지 도시들은 그해가 가기전 함락되었다. 콘라드는 몽페랏 후작 기욤 5세의 차남이었는데 아버지인 기욤 5세는 사실 십자군에 참여했다가 하틴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몸이었다.


 살라딘은 기욤 5세를 끌고 나가 그의 목숨을 가지고 콘라드의 항복을 종용했으나 콘라드는 아버지는 살만큼 살았으니 티레의 돌맹이 하나도 넘길 수 없다고 큰소리 쳤다. 과연 콘라드가 살라딘이 관용을 잘 알고 그런 소리를 한 건지 아니면 정말 진짜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살라딘은 기욤 5세를 죽이지 않았다. (다만 이것은 실제로는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 있던 일이고 티레 공방전에 대한 자세한 기술은 나중에 할 것이다)


 한편 살라딘은 이제 가장 중요한 목표를 공략하기 위해 채비를 했다.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 이었다.




 37. 예루살렘 수복


 살라딘은 처음 무슬림에게도 신성한 도시인 성도 예루살렘을 가능하면 피를 흘리지 않고 점령하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기독교도들에게 너무나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그것은 "다음해 오순절 (그리스도가 부활한지 50일째 되는 날) 까지 그들이 성을 지킬 수도 있고 필요한 농작물을 근처에서 재배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 그 사이 성을 보수해도 괜찮다. 대신 다음해 오순절까지 구원의 희망이 보이면 성도를 지켜도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성도를 나에게 평화롭게 양도하라. 그러면 그대들의 재산과 생명은 모두 보장하겠다" 라는 것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십자군이 약속이나 조약을 어기는 것을 너무나 쉽게 해왔다는 점을 생각할때 매우 파격적인 조항이었지만 - 또 약속을 지킨다는 아무 보장도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지만 - 예루살렘의 십자군은 자신에게도 중요한 그 도시를 절대 넘기지 않겠다고 말했다. 살라딘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예루살렘을 명예로운 방법, 즉 검에 의한 방법으로 접수하겠다고 맹세했다.


 한편 이벨린의 발리앙 (Balian of Ibelin) 은 레몽 3세와 더불어 간신히 하틴 전투에서 빠져나간 몇명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티레로 도망쳤는데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예루살렘에 있었다. 한편 예루살렘 주변은 모두 살라딘의 군대가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유일하게 가족을 데리고 올 수 있는 방법은 살라딘의 관대함에 기대는 것이었다.


 살라딘은 다시 한번 관용을 베풀어 발리앙에게 안전 통행증을 내주었다. 그것으로 예루살렘에게 안전하게 가족들을 데리고 나오라는 것이었다. 다만 가족만 데리고 나올 것이며 예루살렘으로 가서 전투에 참여해서는 안된다는 조건을 달았다. 가족을 핑게로 예루살렘 공방전에 참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발리앙은 살라딘이 약속을 지킨 덕에 예루살렘으로 무사히 들어왔다. 그런데 발리앙을 본 예루살렘의 기독교도들은 워낙 기사가 없었기 때문이었겠지만 그를 즉시 사령관으로 추대했다. 발리앙이 살라딘과의 약속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당시 십자군들은 이교도인 무슬림과  한 맹세는 무효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이미 고인이 된 르노 드 샤티옹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도 예루살렘 대주교인 헤라클리우스 (Patriarch Heraclius) 는 그런 맹세는 무효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발리앙의 죄는 자신이 사해 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발리앙은 거의 떠밀리다 시피 해서 예루살렘 공방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마침내 1187년 9월 20일 살라딘의 대군은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그들은 다윗의 탑에서 부터 다마스쿠스 문까지 공성타워와 투석기와 궁수들을 배치하고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공성 지뢰 - 성벽 밑에 구멍을뚫고 불에 태워 성벽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 - 을 설치했다.


 살라딘의 대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예루살렘의 성벽은 곧 무너질 듯 했다. 9월 29일에는 성벽의 일부가 공성 지뢰와 투석기의 공격앞에 붕괴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성과 함께 죽을 듯이 말했던 십자군들과 기독교도들도 생각이 좀 변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발리앙이 협상을 위해 술탄의 천막으로 갔다. 이미 성벽의 일부에선 살라딘의 깃발이 펄럭이던 시점이었다.


 살라딘은 발리앙을 보고 이미 함락된 성하고도 협상하는 경우를 본적이 있냐며 조소했다. 이제 검으로 성을 점령하겠다는 맹세는 거의 이루어지기 직전이었다. 비록 그날의 공격은 간신히 십자군이 막아냈지만 곧 함락이 임박한 것은 누가 봐도 명확했다.


 이에 발리앙은 다시 협상을 위해 살라딘과 면담했다. 이 면담에서 발리앙은 만약 평화로운 항복을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면 자신들은 무슬림 노예 - 약 5천명 정도 - 를 모두 살육하고 알 아크사 사원과 바위 돔 같은 무슬림의 성소를 모두 파괴할 것이라고 살라딘을 협박했다. 이 말을 들은 살라딘도 마음을 움직여 오직 검으로만 성을 점령하겠다는 맹세를 깨고 평화롭게 성을 양도받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다.


 10월 2일 체결된 협상의 내용은 이러했다. 40일간 여유를 줄 테니 남자는 1인당 10 디나르 (혹은 20 베잔트 - 비잔티움의 화폐단위) 를 내면 무사히 성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여자 2인당 남자 1명으로 치고, 아이 10명당 남자 1명으로 계산하여 (혹은 여자 1인당 10 베잔트, 아이 1인당 5 베잔트라는 설도 있다) 나머지 기독교도들도 무사히 성을 나갈 수 있게 해준다. 40일이 지난 후에도 성에 남아있는 기독교도들은 모두 포로로 삼는다.


 한마디로 몸값을 받고 성을 무사히 나갈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협상이 이루어진 것은 당시의 무슬림 병사들이 대개 용병인데다 약탈에 대한 기대로 전쟁에 참가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줄 급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즉 당시에는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성을 약탈하는 것이 십자군이나 무슬림 모두에게 상식처럼 받아들여졌던 시기였고 이점은 1차 십자군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따라서 살라딘과 발리앙의 협상 내용은 정말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내용이었다. 살라딘을 제외하고서는 누구도 다 점령한 성을 이렇게 몸값만 받고서 양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는 성을 점령해서 재물을 약탈하고 포로는 모두 노예로 팔아서 전쟁 비용을 마련하는 것이 아주 일반적이었다.


 한편 살라딘은 다시 관용을 베풀어 1 디나르도 내지 못할 만큼 가난한 사람들은 3만 베잔트만 내면 7천명을 석방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 정도 돈은 헨리 2세가 구호 기시단에게 보내준 돈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몸값을 내고 석방되는 이들은 모두 다윗의 문을 통과해서 나갈 수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처음으로 다윗의 문을 통과한 이들은 가난한 7천명의 주민들이었다. 이들은 물론 3만 베잔트를 내고 통과하는 것이었다. 이후에 수많은 기독교 인들이 몸값을 지불하고 성을 떠났다. 그런에 이 중에 자신의 처지를 망각한 인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총대주교인 헤라클리우스였다. 그는 교회에서 착복한 막대한 재물들 - 개인 재물은 물론 교회의 황금 접시와 각종 성물 들  - 을 가득 싣고서 10 디나르의 자신의 몸값만 달랑 지불하고 성문을 나섰다.


 헤라클리우스가 자신의 위치를 생각했다면 자신의 재신을 풀어 가난한 이들의 몸값을 대신 지불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 그는 단지 자신의 몸값만 지불하고 막대한 재산을 챙겨 빠져나갔다. 이를 본 에미르들은 살라딘에게 저 악당이 그냥 가게 내버려 둬서는 안된다고 말했지만 살라딘은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그냥 가게 내버려 두었다.


 40일이 지난 후 이제 성안에는 수천명의 가난한 주민들만이 - 이 들 모두를 헤라클리우스와 교회에서 몸값을 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 남아있었다. 이제 약속대로 이들은 노예로 팔려나갈 참이었다. 이를 딱하게 본 살라딘의 동생 알 아딜 (Al Adil) 은 자신에게 1천명을 달라고 했다. 살라딘이 그 소원을 들어주자 알 아딜은 즉시 그들을 자유의 몸으로 석방했다. 나머지 사람들, 특히 그중에서 노인들 역시 살라딘에 의해 모두 그냥 석방되었다.


 한편 살라딘이 이들을 석방한 후에 살라딘 앞에는 수많은 여인들이 울면서 자비를 요청했다. 이들은 전투 중에 죽었거나 혹은 포로로 잡힌 기사들의 아내였다. 이들의 딱한 처지를 알게된 살라딘은 다시 한번 자비를 베풀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명해서 이들의 남편으로 지금 감옥에 갇혀있는 자들은 풀어주고 전투에서 이미 죽은 이들을 위해서는 과부들의 지위에 맞게 살라딘 자신의 개인 자산에서 구호금을 주라고 이야기 했다.


 이 이야기는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해보면 거의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가 할 생각이 들만큼 놀라운 이야기이다. 당대의 유럽이든 아니면 아랍권이든 간에 성을 함락하면 약탈과 파괴는 승자의 권리로 생각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살라딘의 이야기는 모든 기록에서 공통되는 바 이 예루살렘 함락 만으로도 살라딘의 관용과 자비는 이후 전설이 되었다.


 살라딘은 이 모든 일이 끝난후 성소를 복구하고 1187년 10월 9일 알 아크사 사원에서 수많은 무슬림 신자들과 더불어 알라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1099년 예루살렘 이 십자군에 함락된지 88년만에 정말 평화적으로 다시 무슬림의 땅이 된 셈이었다.


 그런데 이 때의 일이 지금까지 회자되는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 1099년 예루살렘 대학살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살라딘의 관용과 자비 때문일 것이다. (예루살렘 대학살에 대해서는 

http://blog.naver.com/jjy0501/100089611329   를 참조) 이를 비교해 본다면 관용과 자비의 군주라는 그의 명성이 전혀 잘못된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다마스쿠스에 있는 살라딘의 동상. 잘 보면 밑에 포로가 된 르노 드 샤티옹도 있다.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Godfried Warreyn )






십자군 전쟁사 - 살라딘 14


 33. 다가오는 결전


 사실 1185년에 살라딘은 당시 섭정이 된 레몽 3세와 휴전 협정을 맺었다. 기 드 뤼지냥과 르노 샤티옹, 그리고 성전 기사단 같은 대 무슬림 강경파 - 그러나 그들은 무슬림에 대해서 적극적인 공세를 펼친 것도 아니고 그냥 약탈만 하러 다녔다 - 이에 반대했지만 보두앵 4세가 위중하고 이후에는 어린 보두앵 5세가 즉위한 혼란스런 와중에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레몽 3세가 생각하기에 군사적으로 열세인 예루살렘 왕국이 우세한 살라딘의 제국에 덤비는 것은 아무래도 자살 행위였다. 몽지사르 전투에서 한번 큰 승리를 거두긴 했어도 적은 그 피해를 금방 회복했다. 더구나 최근 살라딘은 북부 시리아 및 메소포타미아 일부를 병합하여 그 전보다 세력이 더 커졌다. 따라서 저쪽에서 먼저 처들어오려는 생각이 없다면 굳이 상대가 우리를 공격하도록 자극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게 레몽 3세의 생각이었다.


 사실 1185년에는 살라딘은 모술과의 전쟁에 돌입했기 때문에 - 비록 그의 건강이 중간에 악화되어 중단 할 수 밖에 없었지만 - 진짜로 예루살렘 왕국을 공격할 의도가 없었다. 물론 모술이 정복되면 그 다음은 예루살렘 왕국이겠지만 결국 그해에도 모술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대신 1186년에 평화 협정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르노 드 샤티옹에게는 이런 살라딘과의 평화 협상 자체가 불만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자신의 영지인 카락 성 앞을 지나가던 부유한 상인들의 행렬을 약탈하지 않고는 더 이상 참을 수 가 없게 된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르노는 1186년 다시 약탈에 유혹을 참지 못했다. 본래 평화 협정 따위는 휴지조각 만도 못하게 여긴 그였기에 아마도 무슬림 대상들을 약탈하는데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이 1186년의 약탈은 르노에게는 꽤 큰 횡재였다. 막대한 재산을 무슬림 상인들로 부터 약탈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살라딘의 누이가 탄 행렬까지 납치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살라딘은 즉시 항의했고 새로이 국왕이 된 기 드 뤼지냥 역시 인질과 약탈된 재물을 반환하라고 요구했지만 역시나 르노 드 샤티옹은 재물에 눈이 멀어 결국 이를 거부한다.


 아무리 관용의 군주로 정평이 난 살라딘이지만 이와 같은 일을 계속 해서 참는 다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여기에 르노 드 샤티옹의 비열한 행동은 이슬람 권 전체의 분노를 한곳으로 집중시켰다.


 마침내 1187년 3월 살라딘은 저 불경스런 십자군에 대해서 성전 (지하드) 를 선포했다. 이에 범 이슬람 권이 하나로 단결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르노 드 샤티옹의 공이 컸다. 저 멀리 수단과 리비아 부터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리아 이르기 까지 수많은 에미르들과 용병들이 살라딘의 깃발아래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제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처음으로 무슬림들이 하나의 깃발아래 힘을 합쳐 십자군과 싸우는 대 역사가 시작되었다.



 34. 크레송 전투 (Battle of Cresson   1187년 5월 1일)


 이 1187년에는 십자군 전쟁사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전투인 하틴 전투가 발생한 해였다. 그러나 그 전에 예루살렘 왕국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전투가 있었으니 바로 크레송 전투였다.


 당시 에루살렘 왕국은 두개의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역대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중 가장 무능한 인물인 기 드 뤼지냥을 중심으로 르노 드 샤티옹과 성전 기사단 같은 강경파 들이었다. 또 다른 한편은 보두앵 4세와 5세의 전 섭정으로 오랜 세월 국왕을 보좌해온 왕국의 동량인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였다. 그리고 레몽 3세는 어차피 상대가 안되는 상황에서는 살라딘과 가능하면 친하게 지내는 게 낮다고 믿는 화친파였다.


 아무튼 당시까지 레몽 3세가 기 드 뤼지냥을 국왕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 사실 이것은 선왕 보두앵 4세의 유지이기도 했다. 비록 젊은 나이에 죽었고 나병이 육신을 괴롭혔지만 기 드 뤼지냥이 왕국을 패망의 길로 몰아가리라는 예상을 미리 했던 것이 아닐까 - 왕국은 둘로 분열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기 드 뤼지냥의 지지 세력인 성전 기사단의 기사 단장 제라르 리포르 (Jerad of Ridefort) 그리고 구호 기사단의 기사 단장 로게르 드 물랑 (Roger de Moulin) 및 시돈의 레지날드, 이벨린의 발리앙 등이 협상을 위해 레몽의 영역인 티베리아스 (Tiberias) 로 파견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살라딘 역시 르노 드 샤티옹의 행위에 대한 응징을 위해서 아들인 알 아흐딜 (
Al-Afdal ibn Salah ad-din) 에게 7000명의 병력을 주어 티베리아스 근처에서 기회를 노리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안 레몽 3세는 가능하면 살라딘과 싸우기 보다는 협상을 하고자 했다. 그래서 레몽 3세는 알 아흐딜이 공격을 하지 않는 등의 몇가지 조건을 달아서 자신의 영지 근처를 그냥 지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한편 이 사실을 잘 몰랐던 제라르 리포르를 비롯한 기사 130명과 수백명의 보병들은 크래송의 샘 근처에서 이들과 마주쳤다. 병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알 아흐딜의 군대는 그들이 즐겨하던 대로 즉시 흩어졌다. 사실 이는 투르크 족이 좋아하는 유인 전술이었다. 주 목적은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되는 십자군을 자극해 기병과 보병을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1차 십자군 시절부터 정말 오랬동안 사용한 이 방법을 성전 기사단장인 제라르 르포르가 몰랐을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정말 알 수 없게도 제라르는 주저하는 자는 비겁자로 몰면서 즉시 기병을 이끌고 이를 추격했다. 그 다음 벌어진 일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결국 보병대와 분리된 기병은 압도적인 적 기병에 포위되어 전멸하고 기병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보병대 역시 각개 격파 당했다. 





(크레송의 샘 근처에서 벌어진 크레송 전투. 하지만 하틴 전투 그림이라는 의견도 있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이 재앙적 전투 끝에 살아남은 것은 이해할 수 없게도 바로 병사들을 사지로 몰아붙인 제라르 리포르 본인과 아주 소수의 기사들 뿐이었다. 사실 제라르 리포르 같은 인물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십자군 입장에서 다행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비극이었다.


 이 크레송 전투의 결과 비난의 대상이 된 - 그가 무슬림 병력을 그냥 통과 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 레몽 3세는 결국 여론에 굴복해서 기 왕과 화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이들이 협력하게 된 것도 살라딘의 공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살라딘은 대군을 모아 결국 예루살렘 왕국을 친히 침공했다. 



35. 하틴 전투 (Battle of Hattin   1187 년 7월 4일)



 1186년 6월 살라딘의 본대가 마침내 예루살렘 왕국을 향해 움직였다. 당시 살라딘의 군대는 약 3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살라딘은 즉시 티베리아스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티베리아스 요새는 한동안 살라딘의 대군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


 한편 레몽 3세와 기 왕을 비롯한 십자군의 주요 세력은 주요 도시 가운데 하나인 아크레에 집결했다. 당시 구호 기사단과 성전 기사단은 물론 유럽에까지 원군을 요청한 덕분에 이들은 근래에는 보기 힘들 정도의 대규모 십자군 병력을 소집할 수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1200명의 기사와 10000 명의 보병이 집결했다고 한다. 여기에다 영국 국왕 헨리 2세가 보내 준 돈으로 현지에서 투코폴레스 같은 많은 용병들 (Turcopoles -기마 궁사들) 고용했을 뿐 아니라 마침 이탈리아 상업 도시들이 지원해준 석궁병 (Crossbowman) 들도 합류했다.


 따라서 기록에 의하면 적어도 1만 5천 이상의 병력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2만에 육박한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그래도 살라딘의 병력이 3만 이상인 것을 감안하면 병력 면에서는 살라딘이 훨씬 우세했다. 십자군 주력은 아크레에서 세포리아 (Sephoria) 로 이동했다.


 여기서 레몽 3세는 지구전을 주장했다. 살라딘의 군대는 여기저기 먼 곳에서 온 병사들로 이루어져있으므로 장기전으로 끌고 갈 수록 병사들을 붙잡아두기가 어려울 것이었다. 따라서 장기전으로 갈 수록 우리가 유리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티베리아스를 포기할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한다는게 레몽의 주장이었다.


 사실 티베리아스의 요새에서 도시를 방위하는 것은 레몽 3세의 아내인 에쉬바 (
Eschiva) 였다. 그런 만큼 그런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레몽 3세는 지금 티베리아스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군 본대가 그곳으로 가는 것은 바로 살라딘이 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군대를 이동하다가 적의 매복 공격에 걸리거나 혹은 살라딘의 본대에 포위 공격을 당하면 결국 왕국이 위험해질 것이었다. 레몽은 현재 있는 세포리아 (Sephoria) 는 방어에 유리한 위치이므로 이를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기 왕도 처음에는 이 의견을 옳게 여겼다. 따라서 7월 2일 있었던 회의에서 지구전을 하길 결정했었다. 하지만 그날 밤 성전 기사 단장인 제라르와 르노 드 샤티옹은 레몽을 겁장이라고 비난하고 지금 즉시 적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역시 큰 그릇이 못되는 기 왕은 그들의 설득에 넘어가 군대를 이동시켰다. 레몽은 이 결정에 충격을 받았지만 하는 수 없이 병력을 이끌고 합류했다.


(레몽은 기 왕에게 '팔레스타인 전체가 함락되느니 차라리 티베리아스가 함락되고 나와 내 아내가 모든 재산을 잃는 것이 낮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당신이 가는 길은 망하는 길이다' 라고 경고 했다고 한다)


 레몽은 선봉을 맡았고 기 왕은 본대를 이끌었으며, 기타 기사단과 르노 드 샤티옹은 후위를 맡아 십자군은 티베리아스로 전진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성 유물인 참 십자가 (True Cross) 가 역시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이들과 함께 했다. 그러나 그들은 7월 3일에 약 10 km 를 전진했을 뿐이다. 그리고 역시나 매복하고 있던 무슬림 기병들의 산발적인 공격이 이어졌다. 십자군은 점심때 쯤 투란 (Turan) 이라는 곳에 - 여기에는 우물이 있다 - 에서 잠시 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오후의 무더운 햇볕을 받으며 행군을 지속했다. 당시는 7월이라 본래 건조하고 더운 지역인 이곳의 날씨는 매우 무더웠다. 티베리아스 까지는 14 km 정도 거리로 사실 반나절 행군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그날의 몹씨 더운 날씨로 말미암아 무거운 갑옷을 걸친 기사들은 마치 갑옷이 녹아내리는 듯한 고통을 받았다. 따라서 행군 도중 행렬이 크게 늘어졌고 후위 부대는 분리될 정도로 뒤처졌다. 그들은 8km 도 이동하지 못했다.


 이 상황을 우려스럽게 본 기 왕은 행군을 중단하고 그날은 쉬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레몽은 다시 반대했다. 당장은 쉬는게 좋겠지만 그래도 이 더운 건조 지역에서 식수를 확보 못하는 곳에서 휴식을 하는 것은 자살 행위라는 점을 설명하고 힘들어도 식수를 구할 수 있는 곳까지 행군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레몽으로써는 기왕이 자신과 병사들을 파멸로 이끄는 것을 답답하게 볼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의 군대가 쉬게 된 곳은 티베리아스 근방의 하틴의 뿔 (Horns of Hattin) 이라고 알려진 지점에서 가까웠다. 바로 근방에 티베리아스 성이 있었으므로 사실 목적지 거의 근방인 셈이었다. 한가지 문제는 바로 앞서 이야기 했듯이 이들이 쉬는 곳이 하필이면 식수원에서 약간 떨어진 지점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된 살라딘은 즉시 병력을 풀어 투란을 점령하고 퇴로를 막아버렸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7월 4일 아침이 되자 전날 행군에 심한 갈증을 느끼던 십자군들은 티베리아스 근처에 호숫가를 딱 하니 점령하고 있는 살라딘의 군대를 보게 되었다. 




(하틴 전투가 벌어진 하틴의 뿔을 동쪽에서 본 모습. 두개의 낮은 언덕이 뿔처럼 솟아 있다. This image has been (or is hereby) released into the public domain by its author, אלמוג at the Hebrew Wikipedia project. This applies worldwide. )


 사실 십자군이 차지하고 있는 언덕 지형이 싸우기는 더 좋았다. 그러나 문제는 식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살라딘의 지시로 주변에 관목에 불을 지르니 곧 연기와 열기에 의해 이들의 갈증은 더 심해지고 판단력도 흐려졌다.


 이 시점에서 살라딘이 바라는 바는 십자군이 유리한 지형을 버리고 나와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미 퇴로까지 차단당해 사실상 포위 당했으므로 십자군은 큰 선택의 여지가 없기는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어리석은 제라르 리포르와 르노 드 샤티옹은 먼저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사실 그렇게 주장하지 않더라도 갈증에 시달리던 많은 십자군 병사들이 절망적으로 갈릴리 호수로 진격했지만 역시나 기다라고 있던 무슬림의 대군에 의해 하나씩 격파당했을 뿐이었다.


 이 재앙적인 하틴 전투에서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수 있던 것은 레몽 3세와 그를 따르던 조슬랭 3세, 시돈의 레지날드 등이었다. 그들은 훗날 비겁하게 왕을 버리고 달아났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긴 했지만 사실 레몽 3세가 살아서 나가는 편이 기 왕이 도망가는 편보다는 더 좋은 결과를 예루살렘 왕국에 가져올 수 있었다. 다만 그들도 예상 못했던 점은 레몽 3세가 곧 죽게 된다는 점이었다. 이로 인해 살라딘은 더 저항 없이 예루살렘 왕국을 접수할 수 있었다.




(히틴 전투 이후에 살라딘과 기왕의 그림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하틴 전투 이후 수많은 십자군들이 포로로 사로잡혔다. 십자군의 주력은 3천명 정도 남고 괴멸되었기 때문에 이제 팔레스타인 정복 및 예루살렘 함락은 시간 문제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실제로 그해 예루살렘은 살라딘에 의해 함락된다. 


 이제 이 하틴 전투를 유발한 인물에 대한 응징이 있을 차례였다. 살라딘은 전투가 끝나고 나서 막사를 설치하고 이곳에서 포로들을 심판했다. 일단 기 드 뤼지냥과 르노 드 샤티옹이 살라딘의 천막으로 끌려왔다. 이제 곧 자신의 목숨이 끝나는 줄로만 알고 있던 기 왕에게 살라딘은 자신이 마시려고 놔 두었던 시원한 물을 건냈다. 곧 갈증으로 고통스러워하던 기 왕은 살라딘이 자신의 목숨을 살려줄 것이라는 점을 알았다. (적에게 마실것과 먹을 것을 주는 행위는 살려주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기 왕이 물을 르노 드 샤티옹에게 건너자 살라딘은 분노한 얼굴로 그 물은 자신이 아닌 기 왕이 주는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르노 드 샤티옹이 지금까지 해온 죄악을 열거한 후 분노의 일격을 가해 결국 그의 죄 많은 인생의 종지부를 찍게 했다. 




(다마스쿠스에 있는 살라딘 동상 밑에는 이렇게 르노 드 샤티옹이 포로의 신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살아서 저지른 죄악으로 죽어서까지 조롱거리가 된 대표적 사례이다.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르노 드 샤티옹의 목을 베는 살라딘   Guillaume de Tyr, Historia et continuation (BNF Richelieu Manuscrits Français 68, folio 399) (William of Tyre, Historia and continuation (BNF Richelieu French manuscripts 68, folio 399))] This image from the National Library of France (BNF) is a reproduction by scanning of a bidimensional work that is now in the public domain )


 솔직히 르노 드 샤티옹은 알레포의 감옥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거기서 죽었으면 동정이라도 받았을 것이다. 결국 그의 인생 내내 온갖 악행으로 점철되었을 뿐 아니라 결국 그의 행동으로 인해 무슬림을 단결시키고 종국에는 예루살렘 왕국을 패망으로 몰고 갔으니 너무나 당연한 최후였다. 



 한편 이를 본 기왕은 다음은 자신의 차례로 생각하고 공포에 떨었다. 그러는 그를 살라딘은 안심시켰다. 실제로 살라딘은 기왕을 해치지 않고 다만 포로로 잡아갔다. 대부분의 십자군 포로들도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아 가뒀고 이 중 일부는 몸값을 받고 풀어 주었다. 그러나 평소 무슬림들을 약탈하는 것을 주요 임무 중 하나로 여긴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에 대해서 만큼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참수되었다. 


 아마 이 전투가 살라딘이 가장 많은 적들을 한번에 참수한 사례일 것이다. 이 전투이후 살라딘은 자신의 관용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되는데 사실 결과적으로 이로 인해 관용의 군주라는 평판도 얻었지만 대신 십자군에게 매우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아무튼 이제 적의 주력을 분쇄한 만큼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 정복의 과제만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