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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무슬림의 반격 5



 9. 비잔티움 - 예루살렘 동맹


 1159년은 마누엘 1세의 37년 치세 중반기의 승리의 해였다. 더구나 직전에 남이탈리아에서 큰 패배를 겪었기 때문에 더 뜻깊은 승리였다. 한 때 제국의 동방수도였던 안티오크는 다시 제국의 영향력아래 들어갔고,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3세는 마누엘 1세를 더 상위 군주로 섬기는 듯 했다.


 하지만 사실 보두앵 3세가 이렇게 마누엘 1세에 잘 보이는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최근 비교적 잠잠한 누레딘이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다시 행동을 보일 것이라는 짐작 때문이었다. 아마도 누레딘이 시리아 내부의 통합작업을 끝나고 나면 그 다음 목표는 이집트나 예루살렘  왕국일 것임에 틀림없었으므로 보두앵 3세는 이에 대한 대비가 절실했다. 그럴려면 예루살렘 왕국은 지원이 필요했고 마침 그게 가능한 상대는 비잔티움 제국 밖에 없어 보였다.


 사실 예루살렘 왕국의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러브콜은 2년전인 1157년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보두앵 3세의 충복인 토론의 영주 험프리 2세는 이 임무를 위해 비잔티움 제국으로 파견되었다. 여기서 벌어진 협상의 결과 아직 총각인 보두앵 3세와 마누엘 1세의 조카인 테오도라 (Theodora Komnene or Comnena ) 는 서로 약혼하게 되었다. 즉 정략 결혼을 통한 동맹이었다.


 실제 결혼은 다음해인 1158년 11월에 이루어졌다. 당시 보두앵 3세는 28세였고 신부인 테오도라는 13살이었다고 하는데, 정략 결혼이라곤 하지만 이전의 푸아티에의 레몽이나 보두앵 3세나 지금으로 보면 범죄에 가까운 결혼을 한 셈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국가간의 동맹에 이런 정략 결혼이 매우 흔하게 벌어졌고 신부와 신랑이 나이가 꽤 차이가 나거나 아니면 한쪽이 거의 어린아이인 경우도 아주 드물지는 않았으니 그런 관점에서 이 결혼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1159년에 비잔티움 제국이 안티오크에 입성하자 보두앵 3세는 오히려 이를 환영하고 마누엘 1세를 환대했다. 차라리 안티오크가 제국에 넘어간 것이 르노 드 샤티옹이 그대로 차지하고 있는 것 보다 더 좋게 생각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으므로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마누엘 1세가 안티오크에 입성할 때 보두앵 3세는 맨발로 그 뒤를 따랐다.


 당시 마누엘 1세는 41세였고 보두앵 3세는 29세였는데 이 둘은 매우 친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심지어 마누엘 1세는 서방의 복장을 하고 보두앵 3세가 주최하는 토너먼트 경기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친해지긴 했어도 서로의 속셈은 서로 달랐다.


 보두앵 3세는 비잔티움 제국과 동맹을 맺어 누레딘과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비잔티움 제국은 과거 잃어버린 중요한 도시인 안티오크를 다시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목적으로 예루살렘과 동맹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차이로 인해 이 둘의 동상 이몽은 곧 깨지게 될 운명이었다.


 아무튼 1159년 5월에는 이 두 동방 기독교 (엄밀히 말하면 보두앵 3세는 서방 교회이고 마누엘 1세는 동방 기독교이지만) 의 수장이 누레딘의 핵심 거점인 에데사를 새로운 목표로 새로운 전쟁을 계획했다. 사실 에데사 공략이 성공을 거두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누레딘의 입장에서 보면 두 기독교 세력이 힘을 합쳐서 자신을 공격하는 상황만은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누레딘은 현명하게도 에데사 공략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은 편인 마누엘 1세를 공략했다. 마누엘 1세 치세 뿐 아니라 비잔티움 제국은 건국이래 - 사실 5현제 시대 이후 로마제국 자체가 그랬지만 - 이 부유한 제국을 노리는 수많은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해야만 했다. 특히 마누엘 1세의 치세에는 제국의 힘이 약해진 상태라 아주 많은 이민족들이 사방에서 몰려왔으므로 황제는 한곳에 오래 병력을 집중할 수 없었다. 아마도 누레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누레딘은 공손하게도 마누엘 1세와 동맹을 맺으며 더 나아가 2차 십자군 때의 포로 6천명을 모두 반환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마누엘 1세의 체면을 세워주고 에데사 공격을 포기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마누엘 1세 역시 어느 것이 더 이익인지 금방 알아챘다.


 오랜 시간 견고한 요새로 쉽게 공략하기 어려운 에데사에 병력을 집중하는 순간 롬 술탄국이나 남이탈리아의 노르만 족이나 북방의 페네체그 족 따위가 제국을 침범할 지 모른다. 더 나아가 제국의 수도를 오래 비우면 누군가 황위를 찬탈하려 나설 수도 있다. 더구나 에데사를 요행 함락해도 이것만으로는 시리아 전체를 지배하는 누레딘의 세력을 무너뜨릴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누레딘이 롬 술탄국의 무슬림 형제들을 성전의 이름으로 끌어들여 아나톨리아의 남은 제국 영토를 공략할 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면 에데사 공략은 보두앵 3세에겐 몰라도 마누엘 1세에게는 그렇게 구미가 당기는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누레딘이 마누엘 1세의 체면을 세워줄 때 적당히 협상을 하고 물러서는 게 더 이익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마누엘 1세는 역시 이익이 남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했다. 누레딘과 화평을 맺은 것이다.


 이 판단에 대해 현대 역사가들의 평가는 다소 엇갈린다. 아마 당시 보두앵 3세와 마누엘 1세가 합쳐진 병력은 상당히 대규모여서 누레딘의 병력 규모를 뛰어 넘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에데사를 공략하므로써 우트르메르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력을 더 크게 확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가정은 쉽게 할 수 없는 법이다. 사방에 이민족을 둔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로써 마누엘 1세의 신중한 판단은 그렇게 나쁜 판단 같지는 않다는게 필자의 생각이다.


 하지만 보두앵 3세와 다른 십자군들로써는 배신당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허나 바로 옆에 있는 누레딘을 생각할 때 비잔티움 제국과 동맹을 청산하기는 어려웠으므로 일단은 참고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예루살렘 왕국과 십자군 국가들은 비잔티움 제국과 이후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특히 마누엘 1세가 새장가를 들게 되자 보두앵 3세는 이를 기회로 다시 정략 결혼을 추진했다. 마누엘 1세의 이전 황후였던 베르타에 대해서는 이전에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 베르타가 1159년 사망한 것이다. 당시 황후가 죽자 마누엘 1세는 큰 슬픔에 빠졌다고 한다. 하지만 황후의 자리를 계속 비워둘 수도 없는 법. 1160년이 되자 새로운 황후를 간택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 때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3세는 과거 레몽 2세와 오디에르나의 딸이고 레몽 3세의 누이인 트리폴리의 멜리장드 (숙모인 멜리장드 왕비와는 동명이인) 를 후보로 추천한다. 보두앵 3세와는 사촌관계이므로 이를 통해 더 굳건한 동맹을 맺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마누엘 1세는 안티오크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마누엘 1세에게는 과거 공녀 콩스탄스와 푸아티에의 레몽과의 딸인 마리아 (Maria of Antioch) 가 더 좋은 신붓감으로 생각되었다. 마리아는 1145년 생으로 결혼할 당시인 1161년에는 16살이었다. 지금으로 보면 물론 어리지만 당시에는 이 나이면 결혼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으므로 (물론 그의 어머니 콩스탄스의 9살은 당시 기준으로 봐도 문제가 있을 것 같지만) 나이는 문제 될 게 없었다. 다만 신랑인 마누엘 1세가 거의 아버지 뻘인 43세라는 점이 문제일 뿐


(황후 마리아의 초상화  Miniatura de la emperatriz MAría de Antioquía, procedente de un retrato doble con Manuel I Comneno, Biblioteca Apostólica Vaticana.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그런데 콩스탄스와 마리아의 입장에서도 마누엘 1세와 결혼을 해야할 만한 사연이 있었다. 그것은 콩스탄스의 2번째 남편이자 마리아의 계부인 르노 드 샤티옹이 무슬림의 포로가 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콩스탄스와 마리아의 지위가 매우 위태해 졌으므로 누군가 든든한 후원자가 필요한 시점이었고 마침 마누엘 1세가 청혼해 왔으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르노 드 샤티옹이 포로가 된 사연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르노 드 샤티옹은 일단 마누엘 1세 앞에 항복했지만 마누엘 1세가 다시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한 후 본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많은 이들이 르노 드 샤티옹의 죄목이 당시의 기준으로는 사형을 면키 어렵고 지금의 기준으로도 중형을 면키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누엘 1세의 이러한 부당한 처사에 분개했다. 그러나 황제는 용서를 해도 하늘은 용서를 하지 않았던 것일까 ? 마침내 르노 드 샤티옹이 죄값을 치룰 날이 오고 만다.


  1160년 르노 드 샤티옹은 마라쉬 (Marash)를 근방의 시리아와 아르메니아 농부들을 약탈하다가 그만 알레포의 지배자인 마지 알딘 (Maj al-Dīn)에게 붙잡히고 만다. 이는 그의 탐욕이 빛어낸 필연적인 결말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후 알레포로 끌려와 이후 무슬림 감옥에서 17년간 옥살이를 하게 된다.


 솔직히 르노가 한 일을 생각하면 우트르메르의 누구도 이를 동정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아무튼 양녀인 황후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명목상 아버지인 만큼 석방을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막대한 몸값이 논의 되었는데 르노 드 샤티옹이 잡혀있는 동안 몸값 용으로 들어간 황금의 양이 무려 12만 디나르, 무게로 따지면 약 500 kg 이나 된다고 한다.


 이를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아마 천만 달러가 넘는 거액이었으니 결국 르노 드 샤티옹을 살려둔 것은 여러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는 결과를 가져온 셈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거액을 그를 석방하는데 낭비한 것은 그래도 나중에 르노가 풀려나서 한 일들을 고려해보면 별로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17년이 지난후 르노 드 샤티옹은 석방되어 풀려나기 이전보다도 더 무슬림과 십자군 모두에게 엄청난 해악이 된다.





 10. 누레딘의 치세 (1154 - 1162)



 한편 누레딘의 야이기로 다시 돌아오면 1154년 다마스쿠스 점령 후 그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제 시리아의 주요 도시인 알레포, 에데사, 다마스쿠스를 비롯하여 이라크 북부의 모술에 까지 그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향후 누레딘의 세력 확장 방향은 십자군 국가들과 이단 파티마 왕조의 이집트였다. 일단 누레딘은 한템포 쉬고 난 이후 다시 십자군을 우선적인 타겟으로 삼았다. 그가 다시 십자군 국가에 대한 재공세를 시작한 것은 1157년의 일이었다.


 사실 이 시기는 십자군 국가들을 다시 공격하기에 좋지 않은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아마 4-5년 전 쯤이라면 예루살렘 왕국은 국왕파(보두앵3세)와 대비파(멜리장드) 로 나누어져 내분 중이었지만 이 때는 보두앵 3세가 왕권을 확립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누레딘 역시 다마스쿠스란 더 큰 먹이를 노리고 있었고 결국 확보했기 때문에 그다지 손해라는 느낌이 드는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1157년에 누레딘이 목표로 삼은 것은 바로 구호 기사단의 요새가 있는 배니아스 (Banias) 였다. 상관없는 이야기긴 하지만 이곳은 페르시아 제국 시절부터 유서 깊은 지역으로 후세에 CPU의 코드 네임 가운데도 쓰인 적 (바로 1세대 센트리노 제품에 탑재된 130 nm 공정의 1세대 펜티엄 M 제품이다)이 있는 역사 (?)가 서린 지역이다.


 그러나 이 때는 구호 기사단이 효과적으로 누레딘의 공격을 방어했다. 결국 1157년의 공세는 누레딘의 패배로 끝났다. 물론 누레딘의 공세는 이번 한번으로 끝나게 될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 다마스쿠스 점령이후 누레딘의 대 십자군 공세는 다소 주춤한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1160년을 전후로 해서는 공수에 방향이 바뀌어 이번에는 누레딘이 외부의 공격을 방어하는 입장이 되었다. 1159년에는 앞서 설명했듯이 누레딘은 외교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마누엘 1세를 포기시킨바 있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1160년에는 다시 서쪽에 마누엘 1세, 동쪽의 롬 술탄국의 클르츠 아르슬란 2세, 그리고 다니슈멘드 왕조까지 가세해서 누레딘을 공격해 들어왔다.


 사실 이와 같이 여러 세력들이 힘을 합쳐 공격을 했다는 것 자체가 누레딘이 그만큼 위협적인 세력으로 커졌다는 증거였다. 아무튼 1160년에는 누레딘이 이를 잘 방어해냈다. 1160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는 수세에 있었던 누레딘이었지만 이 시기를 넘기고 나서는 누레딘의 치세는 안정화 되었다.


 그런데 누레딘이 독실한 무슬림 교도로써 십자군을 위한 성전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남아있었다. 그것은 바로 성지인 메카를 순례하는 일이었다. 이제 시리아와 그 주변지역이 누레딘의 지배아래 들어왔고, 1162년에는 전체적으로 주변 지역과의 전쟁이 소강 상태에 들어갔으므로 지금이 적기였다. 누레딘은 1118년 생이었으므로 당시 44세 였다. 평균 수명이 짧은 이 시기에 너무 늙게 되면 결국 메카에 가보지 못하고 죽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누레딘이 메카에 순례를 마치고 오자 그는 곧 알라께서 그를 위해 놀라운 선물을 준비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예루살렘 왕국의 젊은 국왕인 보두앵 3세가 사망한 것이다. 사실 예루살렘 왕국에는 줄초상이 이어졌다. 1161년에는 보두앵 3세의 어머니인 멜리장드 대비가 사망했다. 당시 56세이었으므로 그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아주 빠른 죽음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의 아들인 보두앵 3세는 이제 30세로 한창인 나이었다. 그가 과거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나이가 많이 어렸다는 점을 참작한다면 앞으로 한창 나이인 점을 감안할 때 앞으로 예루살렘 왕국 국왕으로써의 활약을 기대해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루살렘 왕국은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1162년 2월 10일 보두앵 3세가 사망하므로써 다시 왕국은 그의 부친인 풀크 국왕이 사망했을 때 처럼 어려움에 빠졌다.


 사실 당시 보두앵 3세가 워낙 젊은 한창 나이에 사망했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독살설이 퍼졌다. 티레의 윌리엄에 의하면 보두앵 3세가 안티오크를 방문했을 때 시리아 정교회 의사로부터 알약을 받고 나서 발열과 이질 증상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시대는 간단한 전염병으로도 젊은 나이에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만약 이질 증상을 보였다면 뭔가 거기에 관련된 전염병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보두앵 3세는 1162년 2월 10일 사망했다.


 보두앵 3세의 어린 아내 테오도라는 불과 16세의 나이로 대비의 자리에 올랐는데 물론 아이는 없었다. 이후 테오도라는 본래 결혼전에 약속 받았던 대로 아크레를 받아 어린 나이에 노후를 보네게 되었다. 그리고 국왕의 자리는 한 때 보두앵 3세가 라이벌로 생각하기도 했던 자파 백작 아말릭 1세 (Amalric I) 에게 돌아갔다.


 아무튼 이와 같은 예루살렘 왕국의 줄초상은 누레딘에게는 알라의 은총으로 생각됐을 법도 했다. 그러나 이미 불혹의 나이를 넘긴 누레딘은 야심보다는 자신의 관용을 베풀 기회로 이를 활용하고자 했다. 결국 누레딘은 보두앵 3세의 사망에 조의를 표시하고 공격을 자제했다. 보통 누레딘 하면 십자군에 대한 끊이지 않은 전의를 불태웠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렇게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다.


 한편 이 시기 이후에 이집트가 십자군 국가와 시리아의 누레딘, 그리고 새로운 인물인 시르쿠의 조카 살라딘이 새로운 무대의 중심에 서게 된다. 물론 1160년대 초반 까지는 살라딘이란 인물은 대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십자군 전쟁사 전체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된다. 그래서 비록 아직 누레딘의 시대이긴 하지만 앞으로는 살라딘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 더 적당할 듯 싶다.


 앞으로의 십자군 전쟁사는 살라딘을 중심으로 설명을 다시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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