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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십자군의 몰락 4





8. 바이바르스


 바이바르스 (  الملك الظاهر ركن الدين بيبرس البندقداري‎, al-Malik al-Zahir Rukn al-Din Baibars al-Bunduqdari   ) 가 이집트의 술탄이 된 것은 1260 년 알 살리히야 (Al - Salihiyya) 에서 였다. 이 곳은 사실 지금 이스라엘 북부 지역으로 쿠투즈 암살 직후 바이바르스는 속전 속결로 자신이 술탄임을 선언한 것이다. 


 바이바르스가 즉위한 날은 1260 년 10월 24일이고 서거한 날은 1277 년 7월 1일이지만 그가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부 문헌들은 그의 탄생이 1223 년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사실 이 역시 정확하지 않다. 이점은 그가 맘루크 출신인 이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수많은 맘루크들의 고향이랄 수 있는 크림 반도 (Crimea) 지역이었다고 한다. 인종적인 배경에 대해서는 킵차크 (Kipchak) 인이라는 설과 쿠만계, 투르크계등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전해지는 설에 의하면 본래 그는 몽골족에게 노예로 잡혔다가 시리아로 팔려왔다고 한다. 처음 그의 주인은 하마의 에미르였는데 이에 의하면 그는 장신에 금발의 백인이었다고 하나 대부분의 역사서에는 그를 투르크계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인종적인 배경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편이었기 때문인지 아무튼 바이바르스의 인종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기록마다 엇갈리긴 해도 그게 바이바르스의 치세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는 그냥 맘루크 출신이고 맘루크 조의 가장 뛰어난 술탄 중에 하나 정도로 모든 설명이 충분한 인물이다. 


 다만 그의 초기 시절에 대한 기록은 기록마다 다소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바이바르스라는 이름 자체가 당시 맘루크 가운데 그다지 드문 이름이 아니었던 듯 해서 혼동의 여지가 존재한다. 아무튼 1250 년 알 만수라에서 루이 9 세의 7 차 십자군에 괴멸적인 피해를 입힌 인물이 훗날의 술탄 바이바르스라는 점은 확실하다. 바이바르스는 1250 년대의 치열한 권력 투쟁에서 겨우 살아남아 다시 쿠투즈 수하로 들어갔는데 사실 쿠투즈도 바이바르스의 능력을 높이 사긴했어도 그를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이런 바이바르스가 아인 잘 루트 전투에서 큰 전과를 세웠기 - 사실 작전은 바이바르스가 세운 것이었다고 한다 - 때문에 이집트로 귀환하면 쿠투즈의 의심은 이전보다 더 커질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기회가 될 때 바이바르스는 속전 속결로 거사를 추진하고 자신이 술탄의 자리에 앉았던 것이다. 이런 면모를 봐서는 바이바르스라는 인물은 단지 뛰어난 장군인 것은 물론이고 기회를 잘 포착하고 적을 공격할 때는 주저하지 않는 과단성을 가진 결단력이 남다른 인물임에 분명하다. 


 이런 인물이 이집트의 술탄이 된 것은 사실 십자군 잔존 세력들에게는 아주 큰 위협이었다. 이제 유럽에서는 십자군의 열의가 크게 식었으며 십자군 잔존 세력들은 사실상 서로 독립 세력화 되어 분열된 상태였다. 여기에 구호 기사단과 성전 기사단도 사이가 나빴고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전쟁 중이었다. 모든 것이 십자군들을 지중해 밖으로 몰아내려는 알라의 뜻으로 - 적어도 바이바르스에게는 - 이해 되었을 것이다.  



 9. 맘루크조의 팔레스타인 침공 


 몽골 제국의 분열과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의 패배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에 새로운 군사적 공백을 가져왔다. 사실상 이곳이 무주 공산이 되었으므로 먼저 차지하는 이가 임자인 상황이 되어 가고 있었다. 바이바르스의 군대는 시리아의 주요 지역을 차지한 이후 다시 방향을 팔레스타인 해안가의 십자군 국가로 돌렸다. 


 새로운 대규모 십자군의 가능성도 희박한 상태에서 그나마 지역 영주와 양대 기사단만이 이 지역을 지키는 보루였지만 이 보루는 바이바르스라는 파도를 견딜 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이 곧 증명되었다. 1260 년대 예루살렘 왕국의 남은 지역들은 하나하나 맘루크 조의 손에 넘어가기 시작했다. 


 비록 1263 년에 있었던 아크레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1265 - 1266 년 사이 카이사레아, 하이파, 아르수프, 사파드 (Safad), 토론이 바이바르스 손에 넘어갔다. 그 중 사파드 (Safad) 에는 성전 기사단이 지키던 십자군 성채가 있었는데 갈릴리를 지키던 주요 요새 가운데 하나였다. 사실 기사단은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여러개의 성채를 모두 수비하기에는 병력이 충분치 않았다. 따라서 현지 인원 중 상당수를 고용해서 인력을 충원하고 있었는데 용병의 전통이 깊은 중근동 지역에선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었다. 


 바이바르스는 이 잘 방어되는 사파드의 성채를 공략할 목적으로 전투를 중지한다면 무사히 퇴각하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여기에 목숨을 버려가면서 요새를 지킬 의지가 없던 현지 용병들은 대거 빠져나갔다. 이제 병력이 크게 줄어든 성전 기사단도 어쩔 수 없이 이 말을 믿고 항복했지만 그것은 함정이었다. 이들에게는 이슬람 교도로 개종하거나 혹은 기독교도로 순교하거나 2가지 선택만이 존재했다. 성전 기사단원들은 사파드에서 모두 순교자의 길을 선택하므로써 적어도 그들의 종교적 신념만은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사파드에 남아있는 십자군 성채 유적   the copyright holder of this work, release this work into the public domain. This applies worldwide.   )   


 이런 점을 보면 확실히 바이바르스라는 인물은 살라딘 처럼 신의를 지키거나 신사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다만 바이바르스는 나름대로 잔인하지만 과단성이 있었고 배신할 때는 정말 확실하게 배신하는 결단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당시 난세에 그를 새로운 영웅으로 만들어준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1266 년 바이바르스 휘하의 맘루크 군은 대담하게도 안티오크 공국을 우회하여 저 멀리 실리시안 아르메니아 왕국을 직접 침공했다. 바이바르스는 아르메니아 왕국이 몽골 제국의 봉신 상태에서 맘루크조를 섬길 것을 요구했다. 이에 국왕 헤툼 1세 (Het'um I) 는 안전을 위해 몽골 제국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1265 년에 죽은 훌라구를 이은 아바카 칸 (Abaqa khan : 일 한국의 2대 칸) 은 당시 황금 군단 (Golden horde : 킵차크 한국) 과 대를 이은 전쟁에 직접적인 지원을 바로 해주긴 힘들었다.  결국 하툼 1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맘루크 군은 아르메니아를 급습하여 수도를 유린하고 왕국을 약탈했다. 


 아마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안티오크 공국의 보두앵 6세는 매우 불안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의 장인인 헤툼 1세와 보두앵 6세는 이미 몽골 제국 - 정확히는 훌라구가 건국한 일 한국 - 의 신하가 된 몸이었고 조공을 바치고 있었지만 일 한국은 킵차크 한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시리아 방면에서 바이바르스가 날뛰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는 실정이었다. 더구나 과거 안티오크 공국의 안전을 보장해 주었던 훌라구도 1265 년 사망했다.  


 이미 해안가의 십자군 잔존 국가는 아크레를 제외하곤 대부분이 바이바르스 손에 넘어갔고 맘루크 조의 영토 경계는 안티오크 - 트리폴리 근방에 도달했다. 따라서 한동안 전란에서 벗어나 한쪽 구석에서 중립과 평화를 누리던 안티오크의 역사도 끝나가고 있었다. 1267 년 아크레를 점령하기 위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후 바이바르스는 마침내 안티오크 공략을 아크레 보다 먼저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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