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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7 차 십자군 3






 4. 1239 년의 마이너 십자군


 사실 후세에는 1,2,3... 차 하는 식으로 편리한 구별을 위해 십자군을 분류했고 여기서도 크게는 그런 분류로 챕터를 만들어 나가고 있지만 실제로는 십자군은 한차례 대규모로 모집되는 것 이외에도 전반적으로 소규모의 중간 규모 십자군이나 혹은 귀족 개인으로 참가하는 형식의 십자군이 꾸준히 있어왔다. 이런 마이너 십자군 가운데 유명한 것들이라고 하면 1101 년의 마이너 십자군과 지금 이야기할 1239 년의 마이너 십자군 등이 있다. 


 앞서 이야기한 티발 백작과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수천 이상의 병력을 포함한 것으로 보이는 이 마이너 십자군은 처음부터 황제가 반대했기 때문에 성지까지 가는데도 상당한 애를 먹었다. 더구나 이미 예루살렘은 황제의 손에 있지 않은가 ? 성지 회복이라는 명분도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이들이 그래도 명분으로 내건 것은 예루살렘이 온전하게 보전될 수 있으려면 주변에 충분한 완충지대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래서 이들은 휴전 협상이 종료되는 1239 년에 맞춰 성지로 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꽤 큰 헛점이 존재했느데, 그들 중 누구도 우트르메르의 정세를 잘 알지 못했으며 사전에 우트르메르의 귀족이나 기사단, 혹은 황제의 가신들과 전혀 상의를 하지 않았으므로 솔직히 누구를 어떻게 공격할 것인지 조차 정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우스꽝스럽게도 전쟁을 하는데 현장에 도착할 때 까지 누구와 싸울지도 정해진 바가 없었다. 그들은 십자군에 참전하겠다고 선언한 이상 누군가와 싸워야 하는데 대체 싸우는 상대가 누구인지 본인들도, 그리고 다른 우르트메르의 귀족들도, 심지어 무슬림들도 몰랐던 것이다. 


 적어도 3-6 차 십자군에 이르는 동안에는 이런 문제가 없었던 이유가 당시엔 적어도 아이유브 제국이 대체로 한명의 술탄에 의해 주로 지배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주적은 아이유브 제국이었다. 하지만 알 카밀의 사후 아이유브 제국은 여러명의 지배자들이 서로 견제하는 상태가 되었고 만약 이 상황을 적절히 활용한다면 십자군은 꽤 큰 이득을 취할 수도 있었다. 이는 마치 1차 십자군에 무슬림 세계의 분열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러나 티발 백작과 그의 동료들은 현지 사정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데다 막연히 십자군의 십자가를 지겠다 (그리고 나중에 일어나는 일들을 감안하건데 전리품에 대한 욕망도 있었을 것이다) 는 생각만으로 현지로 왔기 때문에 그런 커다란 밑그림이나 혹은 전략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결국 이들이 1239 년에 우트르메르에 아무튼 도착한 이후 대체 누구랑 싸울 것인지를 가지고 갑론 을박이 벌어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일부는 적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이집트를 공격하자고 주장했지만 현재 가진 병력으론 터무니 없는 수준이었다. 그보다 다마스쿠스를 공격하자는 의견도 있었는데 예루살렘과의 거리를 생각해보면 적당하긴 하지만 적의 핵심은 이집트라는 당시 십자군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저있는 공감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고심끝에 내린 티발 1 세의 결정은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는데 이집트를 공격한 후 다마스쿠스를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최소한 한쪽과는 동맹을 맺을 수가 있었을 텐데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티발 1세 덕에 무슬림 세계는 최악의 분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더 한심한 일은 그것조차 그렇게 빨리 내려진 결정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1239 년 초에 아크레에 도달했는데 어디를 공격할 지도 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동안 지중해 연안의 경치를 만끽하며 허송세월을 하고 있었다. 티발 1세는 이 평화로운 시기에 시를 써서 본국의 아내에게 부쳤다고 한다. 나중에서야 티발 1세는 병력을 이끌고 아스칼론에 도착 이 지역의 성채를 더 견고하게 요새화 시켰다. 


 결국 1239 년 하반기에 이르러서야 군사 작전이 개시되었는데 그 첫번째 대상은 뜻밖에도 이집트 측이나 다마스쿠스 측이 아닌 케락의 영주 안 나시르와 관련이 있는 대규모 캐러밴 (대상) 행렬이었다. 남진을 하던 중 꽤 큰 대상이 지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십자군은 즉시 약탈할 수 있는 막대한 재물을 생각하고 주저 없이 이들을 공격해서 괜찮은 전리품을 얻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주변 무슬림 국가들은 이 십자가를 옷에 새긴 도적떼로 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동맹을 맺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1239 년은 아주 혼란기 가운데 하나여서 이 시기를 십자군이 잘 활용했다면 아주 큰 것을 얻어낼 수도 있었다. 우선 다마스쿠스에서는 본래 지배자였던  알 살리흐 아이유브 ( Al-Malik as-Salih Najm al-Din Ayyub  ) 는 앞서 언급했듯이 그 해 일어난 반란으로 케락의 에미르인 안 나시르에게 몸을 의탁했다. 대신 다마스쿠스를 차지한 것은 이스마일 (As-Salih Ismail) 이었다. 안 나시르는 다마스쿠스에서 케락으로 쫓겨난 후 꽤 오래 그 지역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주기적으로 다마스쿠스 및 이집트의 술탄과 대립했다.


 안 나시르는 알 살리흐 아이유브의 신병을 인도하라는 이집트의 알 아딜 2세의 요청을 무시하고 그를 구금한 상태였다. 그러던 1239 년 11월 앞서 이야기 했듯이 그해가 다가도록 아무 군사 행동을 하지 않았던 1239 년 십자군이 요르단에서 다마스쿠스로 가는 캐러밴을 약탈했다. 이 부대는 브리타뉴의 피에르 (Peter of Brittany) 가 이끄는 십자군이었다.     


 이로 인해 십자군의 동맹이 될 수 도 있던 또 하나의 잠재 세력인 케락의 안 나시르도 십자군과 적대세력이 되었다.  하지만 한편의 블랙 코메디는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나머지 십자군들은 성지 회복보단 전리품에 눈이 먼 동료들을 질책하기 보다는 자신들도 그런 전리품을 얻기를 원했다. 


 이에 앙리 드 바르 (Henry of Bar) 라는 귀족에 선동에 넘어간 십자군의 한 부대가 본대에서 이탈해서 대담하게도 지금의 이스라엘 남부 국경의 분쟁 지역인 가자 (Gaza) 로 향했다. 이들은 1239 년 11월 15일 보병 1000 명과 기병 500 명이라는 십자군 전체에서 적지 않은 병력을 이끌고 출발했는데 이를 알아차린 티발 1세와 다른 기사단은 빨리 본대로 복귀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재물을 약탈할 욕심에 눈이 먼 기사와 병사들은 이들의 호소를 무시했다. 


 한편 이집트에서는 이들이 이집트를 공격하려 온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맘루크 출신의 장군 바이바르스 (Rukn Ad-Din Baibars) 에게 군대를 주어 이를 공격하도록 했다. 바이바르스는 유능한 지휘관으로 나중에도 다시 언급하게 될 인물이다. 아무튼 그는 용의주도하게 병력을 이끌고 신속하게 팔레스타인 지역에 진입했다. 


 반면 가자 지구에 도달한 앙리 드 바르와 십자군들은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다. 그들은 중장 기병을 주력으로 하는 십자군에게 매우 불리한 사막 지형에 진을 치고 경계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척후병들이 이집트 군을 발견했음에도 그랬다.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일부 십자군들은 진지하게 후퇴를 권유했지만 앙리 드 바르는 지휘관으로써는 최악의 타입의 인간이었다. 즉 무능할 뿐 아니라 용감하기까지 했던 것이었다. 그는 무모하게도 십자군에게 불리한 사막 지형에서 적과 맞서 싸우기로 결정했다. 그 이후 벌어진 전투는 사실 전투라기 보단 일방적인 학살이었다고 전해진다. 앙리 드 바르는 적어도 여기서 병사들과 함께 전사했기 때문에 무능한데다 용감하긴 하지만 그래도 비겁하진 않았다는 평가는 받을 수 있었다. 


 앙리 드 바르의 평가와는 관계 없이 티발 1세가 데려온 병력 중 상당수가 여기서 거의 전멸당하고 기병 일부만이 살아서 돌아왔으므로 십자군으로써는 이 보다 더 나쁠 수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신께서는 이 보다 더 나쁜 일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대상 행렬이 약탈당한데 분개한 안 나시르가 병력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보복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사실 예루살렘 자체의 방어기능은 현저히 약해져 있었고 이 도시는 당시엔 평화 협상에 의해 방위가 유지되던 참이라 안 나시르가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것 자체는 매우 쉬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성벽의 기능이 유지되지 못한 상태였지만 다만 요새화 된 다윗 탑은 27 일 정도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안 나시르 역시 이 도시를 점령하긴 쉬어도 유지는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에 보복 약탈 및 요새를 파괴한 후 다시 케락으로 후퇴했다. 


 이렇게 되자 티발 1세와 그의 십자군이 1년 남짓 성지에 와서 한 일이라곤 캐러밴을 약탈한 것 이외에 적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고 본래 멀정하게 십자군 손에 있었던 예루살렘이 유린 당한 것 뿐이었다. 도저히 떳떳이 고개를 들고 귀국할 수 조차 없는 성과였다.


 그런데 이 일련에 사태에 의기소침한 티발 1세에게 패자 부활전의 기회가 다가온다. 그것은 아이유브 통치자들 사이의 다시끔 불화가 찾아오고 더 나아가 본래 사이가 나쁘던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의 사이가 크게 틀어진데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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