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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7 차 십자군 5





 8. 라 포르비에 전투 (Battle of La Forbie) 


 라 포르비에는 현재 하르비야 (Harbiyah) 로 알려지 있기 때문에 하르비야 전투라도고 부른다. 이 지역은 지금의 가자 지구 북동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1244 년 다시 십자군 전쟁 사상 중요하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전투가 발생한 장소이기도 하다. 


 1244 년의 예루살렘 왕국은 명목상의 왕 콘라드 4세 (예루살렘 국왕으로는 콘라드 2세) 가 멀리 유럽에서 통치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해 사실상 각 귀족들과 기사단의 분할 통치로 거의 반 와해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십자군들이 만만하게 봤던 이집트군이 호라즘 용병들과 힘을 합쳐 팔레스타인에 상당한 병력을 파병하고 예루살렘과 주변 도시를 유린하자 (이 일은 거의 반 도적 떼로 변한 호라즘 용병들이 담당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낌 다마스쿠스와 십자군 연합은 다시 힘을 합쳐 이집트군을 격파할 계획을 세운다. 


 사실 그런 계획이 있었다면 호라즘 용병들이 예루살렘 약탈에 정신이 팔렸을 바로 그 때 이들을 기습해서 이집트군의 주력과 합치지 못하게 각개격파를 했어야 했는데 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호라즘 용병들의 진격이 빨랐으므로 결국 이집트군과 호라즘 용병은 아무 방해나 손실을 입지 않고 지금의 이스라엘 남부인 가자 지구에서 서로 병력을 합칠 수 있었다. 


 이들의 병력은 기병 5000 기 에 적어도 6000 명 이상의 보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다마스쿠스와 케락의 무슬림 군주들 뿐 아니라 십자군 진영에도 충분히 위협이 될 만한 규모였다. 이를 지휘하는 인물은 맘루크 출신의 루큰 앗 딘 바이바르스 ( Rukn Ad-Din Baibars
) 로 술탄 앗 살라흐 아이유브의 경호를 담당하면서 급속도로 그 지위가 상승하고 있던 젊지만 유능한 장군이었다. 훗날 그는 술탄의 자리까지 오르면서 십자군과의 질긴 악연을 이어나간다. (주 : 일부 연구에서는 그냥 동명 이인이란 주장도 있다) 


 십자군 무슬림 동맹군에서 십자군 측 주력은 사실상 왕국의 상비군 역활을 하고 있던 구호기사단 및 성전 기사단을 비롯한 기사단들이었다. (여기에 성 라자러스 기사단 및 튜튼 기사단이 합류했다) 그외 나머지 잔존 병력들이 십자군에 합류하긴 했지만 오랜 기간 무의미한 내전과 신성 로마 제국 본국의 지원 미비로 인해 사실 병력 규모는 예루살렘 왕국 전성기에 비해 미미했다. 


 이들에게 합세해서 어느 정도 병력을 채워준 것은 무슬림 동맹군이었는데 오랫만에 무슬림 영주들이 이집트에 대항해서 힘을 합친 상태였다. 일단 홈스의 에미르였던 알 만수르 (al-Mansur) 는 2000 천의 기병과 다마스쿠스에서 지원받은 병력을 이끌고 십자군과 합류했다. 케락의 안 나시르 역시 병력을 보내왔으므로 이들의 총 병력은 곧 11000 명 정도로 얼추 이집트 - 호라즘 군과 비슷한 수준까지 늘어났다. 


 십자군 측은 국왕이 사실상 부재한 상태였기 때문에 지휘를 맡은 것은 자파 및 아스칼론 백작인 발터 4세 (Walter IV of Brienne) 였다. 기독교 측 병력은 대략 기병 1000 기에 보병 6000 명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무슬림 측 병력 및 베두인 족들로 부터도 2000 기의 병력을 추가로 보충받았기 때문에 병력 면에서는 사실 십자군 - 무슬림 연합군이 더 유리했으나 전혀 통일성이 없는 군대라는 큰 약점이 있었다. 


 1244 년 10월 17 일에서 18 일 사이 벌어진 라 포르비에 전투는 사실상 잡다한 각양각색의 부대가 모인 군대는 역시 지휘체계가 비교적 통일된 군대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 전투였다. 전투에 앞서 일부 무슬림 영주들은 지구전이나 요새전을 주장했으나 십자군의 발터 4세는 이에 반대했다. 


 신용 없기로 명성이 자자한 호라즘 용병들은 오랜 시간 주인에게 충성심을 받치지 않을 것이므로 시간을 오래 끌수록 유리한 장점은 있었으나 오랜 시간 유지되기 어려운 점은 사실 무슬림 - 십자군 연합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이들의 종교와 인종이 달라서라기 보다는 각 영주와 기사단장들이 서로를 불신하고 있고 (종교적이나 인종적으로 비슷한 그룹끼리도 심지어 사이가 좋지 못했다) 다툼을 그친적이 별로 없기 때문에 장시간의 동맹은 불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전투가 시작되기전 부대 배치에서 십자군은 우익을 홈스 및 다마스쿠스 군은 중앙을 베두인 족은 좌익을 맡았다. 연합군은 이런 식으로 부대를 배치해야 그나마 서로 엉켜서 혼란을 일으키지 않을 정도로 통일성이 없는 군대였다. 연합군의 주공을 담당한 것은 우익의 십자군 기사들로 이들이 이집트 군을 향해 기마 돌격을 실시해 적의 진형을 무너뜨리는 것이 공격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전투가 시작되자 바이바르스가 이끄는 이집트 군은 적의 기마 돌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오랜 전투가 지속되고 18 일 아침이 다가오자 바이바르스는 호라즘 용병들을 중앙의 다마스쿠스 부대 쪽으로 진격시켜 적의 중앙을 와해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양단으로 분열된 연합군은 그대로 패주하기 시작했다. 안 만수르는 겨우 280 기만을 데리고 퇴각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교도 동맹군인 십자군은 더 운이 좋지 못했다. 


 십자군은 완전히 붕괴되기 전에 기사들을 중심으로 몇 시간 정도 저항할 수 있었지만 결국 포위당해 괴멸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적어도 5000 명 이상의 십자군이 죽고 800 명이 사로잡히는 거의 괴멸적인 피해가 십자군, 특히 양대 기사단을 덮쳤다. 사령관인 발터 4세는 물론 구호 기사단장도 그자리에서 전사했다. 


 당시 살아남은 기사가 얼마나 소수였는지 각 기사단 별로 그 수를 셀수가 있었는데 성전 기사단 33명, 구호 기사단 27 명, 그리고 튜튼 기사단원 3명만이 살아서 이 전장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 패배는 하틴의 전투 이후 가장 큰 십자군측 패배로 기록되어 있으며 사실상 예루살렘 상실을 확정지은 전투나 다름없었다. 그 후 600 년 이상 성도 예루살렘은 이슬람 세력에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렇듯 큰 패배를 당하고 나서 다시 유럽에서 십자군에 대한 요청이 일어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1차 십자군 때와 같은 열정적인 움직임은 없었지만 앞서 이야기 한 데로 루이 9세가 이 부름에 응답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 역시 이를 주창했다. 다만 프리드리히 2세는 앞서 말한 문제 때문에 이에 참전할 수 없었다. 


 앞서 7 차 십자군 시작에서 던진 질문은 이로써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기독교 세계에 반환되었던 예루살렘이 1244 년에 다시 이교도의 손에 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주 영구적으로 넘어간 셈이었다. 



 9. 다미에타 상륙 작전


 다시 루이 9세의 십자군으로 돌아오면 그들은 1248 년 8월에 성지를 향해 출항했다. 일단 1차 목표는 키프로스였다. 그러나 키프로스에 도달할 무렵에는 겨울이 가까워져 왔으므로 이들은 키프로스에서 월동하기로 결정했다. 당시의 항해술로는 거친 바다에 뛰어드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키프로스에서 기사단장들을 접견한 루이 9세는 - 그래도 기사단들은 유럽에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어 다시 그 세력을 회복하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 현지 사정에 밝은 이들과 함께 이듭해의 공격 계획을 세웠는데 주 목표가 이집트가 되어야 한다는데 아무도 이견이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이집트 나일 삼각주 하류의 심장부로 가는 길목에 있는 주요 도시인 다미에타에 상륙하는 것을 첫번째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이 요새 도시는 만만치 않게 요새화 되어 있을 뿐 아니라 바다와 육지 양측에서 포위하지 않고서는 사실상 포위 자체도 불가능한 위치에 있었다. 이 요새의 견고함은 지난 십자군 전쟁에서 아주 잘 증명된 바 있었다. 




(7 차 십자군의 13세기 삽화  Guillaume de Saint-Pathus, Vie et miracles de Saint Louis.  public domain  ) 


 그러나 다미에타를 함락해서 해안가에 교두보를 확보하지 않는 이상 알렉산드리아나 카이로 모두 점령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십자군은 1249 년 초반의 1차 목표를 다미에타로 결정했다. 이것은 사실 재앙으로 끝난 7 차 십자군에서 가장 잘한 결정 가운데 하나였다. 


 왜냐하면 이집트 군이 전혀 예측을 못한 지점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집트 군은 이번에도 다미에타로 뻔한 공격로를 선택하지는 않을 것으로 오판했다. 5차 십자군에서 엄청난 손실을 본 전례가 있을 뿐더러 십자군이 성지를 우선 되찾기 위해 팔레스타인 방면으로 상륙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7 차 십자군은 별 어려움 없이 1249 년 5월 다미에타에 상륙할 수 있었다. 


 그 이후 벌어진 것은 다미에타 상륙전 사상 가장 수월한 상륙이었다. 빈약한 수비대가 다미에타를 지키는 것을 포기한 덕분에 1249 년 6월 9일 이 도시는 십자군의 손에 넘어왔다. 하지만 사실 이제부터가 더 문제였다. 다미에타를 장악한 이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 ? 뜻밖에 다미에타를 쉽게 점령한 루이 9세에게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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