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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뇌제 (8)






 15. 리보니아 기사단 


 이전에 언급한 것처럼 이반 4 세는 1550 년대 동쪽 국경선의 골치 거리인 카잔 한국과 아스트라한 한국을 차례로 집어 삼키고 볼가강 동쪽으로 영토를 팽창했다. 결국 이것은 러시아 역사에서 시베리아로 가는 길을 열었다고 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한편 러시아 서쪽에는 폴란드 - 리투아니아 연합이라는 만만치 않은 상대가 존재하고 있었다. 


 인접한 두 강대국이 계속 사이 좋게 지내는 경우는 드문 법이다. 이반 뇌제의 시기에도 멈추지 않고 팽창을 계속하는 러시아는 폴란드 - 리투아니아 연합에게는 사실 꽤 신경쓰이는 존재였고 반대로 러시아 입장에서는 서방과의 교류를 위해서 발트해로 진출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에도 러시아는 르네상스 시대 빠르게 발전하는 서유럽의 문화와 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서방으로의 창이라고 할 수 있는 발트해에 전진 기지를 건설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했다. 하지만 이것은 이 지역에서 튜턴 기사단을 몰아내고 사실상 패권국 노릇을 하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합에게 큰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일단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 지역은 발트해 연안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리보니아 기사단 (Livonian Order ) 이 지배하는 리보니아 (지금의 라트비아 및 에스토니아 지역) 이었다.
. 리보니안 기사단은 1202 년 리가 (Riga) 의 주교인 알베르트 (Albert of Riga, Albert Buxhoevden ) 에 의해 창립된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 (Livonian Brothers of the Sword) 에서 시작되었다. 이 기사단은 현재의 발트해 3 국 근방의 주민들을 서방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이 지역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설되었는데 주로 독일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칼을 든 전사 수도승 (Warrior Monk) 으로 구성된 기사단으로 그 상징도 십자가와 칼이었다. 보통 이슬람 전사들을 소개할 때 한손에 칼, 한손에 코란을 이야기 하지만 이들은 십자가와 칼이 그 상징이었던 셈이다. 국내에는 검우기사수도회 (劍友騎士修道會 ), 검의 형제 기사단 등으로 번역되는데 독일어로 Schwertbruder (Brothers of the Sword ) 이므로 맞는 번역이라고 하겠다. 여기서는 그냥 가장 흔히 알려진 리보니아 기사단으로 약칭한다.


 아무튼 이 기사단은 1236 년 사모기티안 (Samogitians. 리투아니아의 두 주요 부족 가운데 하나) 족과의 전쟁이었던 사울렌 전투 (Battle of Schaulen (Saule)) 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이후 1237 년에는 발트해 연안의 강자였던 튜턴 기사단의 밑으로 들어가게 된다. 



(1260 년경의 리보니아 기사단의 영토. 이들은 이후 수백년간 이 지역에서 튜턴 기사단의 일부로 살아남았다. A political map of the Medieval Livonia, circa 1260, along with surrounding areas.
Originally created by MapMaster  )    


(리보니아 기사단의 상징은 십자가에 칼이다.  History of Estonia, 2007, ISBN: 9789985209303  ) 


 이후 리보니아 기사단은 분명 형식적으로는 독일 기사단의 동쪽 지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적으로 세력을 유지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룬발트 전투 (1410) 이후 리투아니아의 힘이 매우 강해지고 튜턴 기사단의 힘이 약화되자 리보니아 기사단도 그 여파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1435 년 스위엔타 전투 (Battle of Swienta, 혹은 Battle of Vilkomir, Ukmergė, Pabaiskas,  Wilkomierz  등으로도 불림) 에서 결국 폴란드 - 리투아니아 연합에 대패한 튜턴 - 리보니아 기사단은 리투아니아와 리보니아에 대한 영향력이 더 약해졌고 리보니아 기사단령은 자치권을 가진 리보니아 연방 (Livonian Confederation) 으로 바뀐다. 


 리보니아 기사단의 힘은 이후 더 약화되지만 그럼에도 16세기 중반까지 리보니아 연방과 리보니아 기사단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가 주변을 정리하고 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되고 발트해의 창을 노리게 되자 그 위치가 더 위험해질 수 밖에 없었다. 두 강대국 사이에 낀 소국으로써 리보니아 연방은  피할 수 없는 태풍에 노출될 운명이었다.  



(1534 년 당시의 리보니아 연방   Old Livonia in 1534. Numbers are for provinces of Livonian Order (white): 1- under direct rule of Livonian Master ; 2- domain of field marshal ; 3- commander of Fellin/Viljandi ; 4- commander of Tallinn/Reval ; 5- advocate (Fogt) of Jarva/Jerwen ; 6- commander of Kuldiga/Goldingen ; 7- commander of Aluksne/Mareinburg; 8- commander of Parnu/Pernau ; 9- advocate of Maasilinna/Soneburg ; 10- commander of Rakvere/Wesenberg ; 11- advocate of Narva ; 12- advocate of Vasknarva/Neuschloss ; 13- advocate of Toolse/Tolsburg ; 14- commander of Kursi/Talkhof ; 15- advocate of Bauske/Bauska ; 16- advocate of Rezekne/Rositten ; 17- commander of Dunaburg/Daugavpils ; 18- advocate of Selpils/Selburg ; 19- advocate of Dobele/Dobeln ; 20- advocate of Kandava/Kandau ; 21- advocate of Grobina/Grobin ; 22- commander of Ventspils/Windau   :   Leonid Arbusow's Grundriss der Geschichte Liv-, Est- und Kurlands (1918)   저자  Athanasius Soter ) 



 16. 리보니아 전쟁의 배경


 16 세기에는 유럽의 크게 성장하던 시기였다. 발트해 역시 단지 유럽의 변방이 아니라 활발하게 무역이 진행중에 있었다. 목재와 철, 구리 등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발트해 연안 국가에 풍부한 자원들이 프랑스와 네덜란드, 독일 등지에 매우 중요한 품목으로 거래되었다. 당시는 상업 혁명의 시대였고 신항로 발견으로 인해 무역이 크게 늘어나면서 선박을 비롯 무기와 각종 물품을 만드는데 위의 자원의 수요가 급증했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북방의 주요 강대국들 사이에 사이가 좋을 수만은 없었다. 


 이반 4세 역시 발트해 무역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여기에 새로운 항구 도시를 확보해서 직접 서방 국가들과 무역과 교류를 추진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서방의 앞선 문물을 직접 쉽게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꽤 수지 맞는 장사에 직접 뛰어들어 국가 경제와 재정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훗날 표트르 대제가 원했던 것을 이미 이반 뇌제도 똑같이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발트해의 상황이 호락호락 하지는 않았다. 일단 스웨덴과 폴란드가 큰 걸림돌이었다.  


 리보니아 전쟁 전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는 칼마르 동맹 (Kalmar Union 1397 - 1523 년) 을 통해 하나의 연합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칼마르 동맹은 덴마크 주도하의 연합 왕국이었는데 스웨덴은 이 시스템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1523 년 스웨덴이 여기서 독립하면서 칼마르 동맹은 덴마크 - 노르웨이 (사실상 덴마크가 지배) 와 스웨덴으로 분리되었다. 


 여기서 독립한 스웨덴은 이후 북방의 강자로 군림하게 되는데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풍부한 자원과 자본력, 그리고 유능한 국왕들의 힘입어 스웨덴은 러시아가 쉽게 이길 수 없는 상대가 되어 있었다. 위치상 스웨덴이 러시아와 리보니아 연합에 가깝기 때문에 러시아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여기에 스웨덴 역시 이미 약체가 된 리보니아 연방으로의 진출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은 예정되어 있었다. 리보니아 진출의 과업은 바사 왕조 (Vasa dynasty) 의 창건자이자 스웨덴의 국부라고 불리는 구스타프 1세 (Gustav I Vasa) 의 아들 에릭 14 세 (Eric XIV) 가 호시탐탐 노리는 일이기도 했다.   


 한편 러시아와 충돌이 불가피할 만큼 국경이 맞붙은 폴란드 - 리투아니아 역시 러시아의 발트해 진출이 영 못마땅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리보니아 전쟁전 러시아는 발트해에 살짝 노출된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아주 노골적으로 발트해 진출을 노리는게 분명했으로 누구보다 폴란드 - 리투아니아 측이 여기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발트해 진출이 러시아에 그렇게 유리하다면 폴란드 - 리투아니아 측에는 매우 불리한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러시아에 팽창에 심기가 불편한 군주는 폴란드 국왕 겸 리투아니아 대공인 지기스문트 2세 (지기스문트 아우구스투스  Sigismund II Augustus I ) 였다.     



(지기스문트 아우구스투스의 초상화   Portrait of Sigismund II Augustus.  public domain image ) 


 러시아와 폴란드간의 전운이 감돌면서 위험한 처지에 놓인 것은 오히려 양국 사이의 소국이 된 리보니아 연방이었다. 마치 미국 소련간 냉전 덕에 엉뚱하게 이들이 아니라 한국 같은 당시 약소국들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휘말린 것 처럼 앞으로 수십년간 지루한 전쟁이 리보니아를 두고 벌어질 예정이었다. 


 한편 이반 뇌제는 1550 년 이후로 발트해 주변에 이권을 가진 주요 국가들의 심기를 매우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앞서 이야기 했듯이 러시아도 발트해에 발을 담그기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반 뇌제는 이반고르드 (Ivangorod) 라는 도시를 나르바 강 하류 강둑에 건설한다. (1550 년) 여기에는 이반 3 세 시절 부터 건설한 요새가 있었는데 이를 항구 도시로써 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반고르드는 후에 건설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는 달리 항구도시로는 쓸모가 없었다. 강이 깊지가 않아 큰 선박이 정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반 4세는 리보니아에 대해 이런 저런 간섭을 시작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이반 4세 입장에서는 폴란드가 매우 신경쓰이는 상대이므로 1554 년 리보니아는 폴란드와 15 년간 동맹을 맺지 않기로 러시아와 조약을 맺었다. 이와 같은 러시아의 간섭이 바로 리보니아 연방의 주권을 빼앗고 마침내 합병하려는 의도라는 것을 지기스문트 아우구스투스가 모를리 없었다. 


 발트해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리보니아 전쟁이 시작되기 전 스웨덴은 이미 러시아와 한판 전쟁을 치뤘다. 러시아 - 스웨덴 전쟁 (Russo-Swedish War of 1554–1557 ) 이 그것으로 확실한 승자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단 결과적으로 러시아 측에 유리한 내용의 노브고르드 조약 (Treaty of Novgorod  1557) 이 맺어졌다. 여기서 스웨덴은 리보니아나 폴란드가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면 폴란드/리보니아를 지지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스웨덴은 물론 덴마크 - 노르웨이까지도 폴란드 - 러시아간 전쟁이 발생하면 리보니아에 들어와서 자신의 몫을 차지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주변의 4대 강대국 - 러시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스웨덴, 덴마크 - 노르웨이 - 들은 발트해라는 이권의 바다에서 자신의 몫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본래 이것과는 무관했던 리보니아가 새로운 메인 메뉴로 강대국의 식탁에 오르게 된 상황이었다. 다만 본래 한 사람 몫을 네명이 싸워서 차지하는 식이었으므로 테이블 매너 따위는 생각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 땅이 누구에게 돌아가든 본래 주인인 리보니아 연방의 몫은 없었다.   


 다음에 계속 : http://blog.naver.com/jjy0501/100181496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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